
얼마 전 대형 SUV를 타는 지인을 만났는데, 대화가 자연스럽게 EV9으로 흘렀다. 전기차인데 3열이 있고, 차체는 거의 패밀리 밴처럼 크고, 가격은 집에서 쉽게 꺼낼 이야기가 아닌 수준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EV9은 그냥 멋있는 전기 SUV인지, 아니면 실제 가족용 차로도 말이 되는 선택인지 숫자부터 하나씩 따져봤다.
처음 걸리는 건 역시 가격이었다
기아 공식 가격표 기준으로 2026 EV9은 세제 혜택 후 2WD 라이트 스탠다드가 6,197만 원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이미 마음이 한 번 멈춘다. 보통 전기 SUV를 생각할 때 4천만 원대나 5천만 원대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은데, EV9은 시작점부터 대형차 가격이다.
롱레인지로 가면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변한다. EV9을 보는 사람 대부분은 1회 충전 주행거리를 신경 쓸 수밖에 없고, 그러면 76.1kWh 배터리의 스탠다드보다 99.8kWh 배터리의 롱레인지에 눈이 간다. 예를 들어 2WD 에어 롱레인지는 세제 혜택 후 7,205만 원으로 안내된다. 옵션을 더하면 7천만 원 중후반도 금방이다.
솔직히 이 차는 “전기차 보조금 받으면 괜찮겠지” 정도로 접근하기엔 부담이 있다. 지역별 보조금, 취득세, 보험료, 충전 환경까지 같이 봐야 한다. 특히 아파트 완속 충전이 어렵다면 유지비 장점이 생각보다 작게 느껴질 수 있다.
차 크기는 장점이자 숙제다
EV9 기본형 제원은 전장 5,010mm, 전폭 1,980mm, 전고 1,755mm, 휠베이스 3,100mm다. 숫자로 보면 감이 덜 오는데, 전폭 1,980mm가 꽤 중요하다. 일반 주차칸에 넣으면 옆 차와 문 여는 간격이 아슬아슬할 수 있는 폭이다.
대신 실내 공간은 확실히 기대할 만하다. 휠베이스가 3.1m라 2열 공간이 넉넉하고, 3열을 가끔 쓰는 가족이라면 내연기관 3열 SUV보다 전기차 플랫폼의 장점을 체감하기 쉽다. 바닥이 비교적 평평하고, 앞뒤 공간 배분이 여유롭기 때문이다.
- 초등학생 자녀 2명 이상이면 2열 활용도가 높다.
- 부모님을 자주 모신다면 6인승 독립시트 구성이 편하다.
- 캠핑 장비가 많다면 3열을 접었을 때의 적재 공간이 꽤 매력적이다.
- 도심 기계식 주차장을 자주 쓴다면 차 크기부터 확인해야 한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넓다’와 ‘편하다’가 항상 같은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차가 큰 만큼 좁은 골목, 오래된 지하주차장, 마트 주차장 코너에서는 운전 피로가 생긴다. 시승할 때 넓은 도로만 달리면 이 부분을 놓치기 쉽다.
주행거리는 롱레인지 2WD가 가장 설득력 있었다
정부 신고 기준으로 EV9 스탠다드 2WD 19인치 모델은 복합 374km다. 출퇴근 위주라면 충분할 수 있지만, 대형 패밀리 전기 SUV를 사는 사람이 주말 장거리까지 생각한다면 조금 애매하게 느껴질 수 있다.
반면 롱레인지 2WD 19인치 모델은 복합 501km로 안내된다. 도심 559km, 고속도로 429km라는 숫자도 눈에 띈다. 실제 주행에서는 계절, 탑승 인원, 히터 사용, 고속 주행 비율에 따라 줄어들겠지만, 시작 숫자가 500km대라는 건 심리적으로 크다.
4WD는 힘이 확실히 좋아진다. 롱레인지 4WD는 최고 출력 283kW, 마력으로는 384ps 수준이고 토크도 600~700Nm로 올라간다. 그런데 복합 주행거리는 19인치 기준 445km다. GT-Line 4WD 21인치는 복합 443km로 비슷하다. 즉, 힘과 디자인을 고르면 주행거리와 가격에서 조금씩 양보하는 구조다.
내가 고른다면 우선순위는 이렇다
- 장거리 가족 이동이 많으면 롱레인지 2WD 19인치가 무난하다.
- 눈길, 언덕길, 고속 추월감을 중요하게 보면 4WD가 낫다.
- 외관 존재감이 중요하면 GT-Line이 끌리지만 비용 부담은 커진다.
- 시내 위주 세컨드카 개념이면 스탠다드도 가능하지만 EV9의 가격대를 생각하면 선택이 쉽지 않다.
전기차라서 좋은 점과 귀찮은 점이 같이 온다
EV9의 장점은 차 안에서 조용함이 크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큰 차체와 전기 모터 조합은 저속에서 특히 편하다. 아이가 뒤에서 자거나, 장거리 이동 중 대화가 많은 가족이라면 이 조용함이 꽤 큰 만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실내 V2L 콘센트가 들어간다는 점도 생활형 장점이다. 캠핑장에서 조명, 전기포트, 노트북 같은 걸 쓰는 상황을 생각하면 “있으면 좋은 기능”이 아니라 실제로 써먹을 일이 생기는 기능에 가깝다. 물론 배터리를 쓰는 기능이라 남은 주행거리 계산은 같이 해야 한다.
귀찮은 점도 분명하다. 완속 충전 자리가 집이나 회사에 안정적으로 있어야 EV9의 장점이 살아난다. 공용 급속 충전만 믿고 운용하면, 충전소 이동 시간과 대기 시간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질 수 있다. 특히 대형 배터리라 충전량을 많이 채우려면 시간 관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겨울에는 실주행거리가 줄어든다. 기아 안내에서도 외기온도 하락 때 배터리 성능 저하로 실제 주행거리가 감소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겨울 고속도로 장거리 이동이 잦다면 평소 주행거리의 여유분을 넉넉하게 잡는 게 좋다.
EV9은 누구에게 맞을까
EV9은 단순히 “큰 전기차가 갖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고르면 부담이 크게 남을 수 있는 차다. 가격이 높고, 차체가 크고, 충전 환경을 탄다. 대신 조건이 맞으면 꽤 뚜렷한 장점이 있다. 6인승이나 7인승을 자주 쓰고, 장거리 가족 이동이 많고, 집밥 충전이 가능하다면 EV9은 대체재가 많지 않은 차다.
내 기준에서는 롱레인지 2WD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처럼 보였다. 화려한 옵션이나 4WD 성능도 끌리지만, EV9이라는 차의 생활 가치는 넓은 공간과 긴 주행거리에서 먼저 나온다고 느껴졌다. 큰 차가 필요한데 전기차의 조용함과 유지비 장점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꽤 진지하게 계산해볼 만한 선택지다.
다만 시승은 꼭 좁은 주차장과 평소 다니는 동선까지 떠올리면서 해보는 게 좋겠다. 전시장에서는 근사한 차인데, 내 생활 반경에서는 버거운 차가 될 수도 있으니까. EV9은 좋은 차냐 아니냐보다, 내 집 충전기와 내 주차장과 내 가족 이동 패턴에 맞느냐가 더 큰 질문으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