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미국동부여행을 하면서 뉴욕과 보스턴 사이를 몇 번 오갔는데,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전망대도 미술관도 아니었다. 아침 기차에서 내려 아직 문을 덜 연 카페 앞을 지나고, 동네 사람들이 강아지 줄을 잡고 천천히 걷던 골목들이 더 선명했다. 여행지라는 말보다 생활권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들. 그런 장소를 일부러 골라 걸었다.
미국 동부는 이름난 도시가 워낙 강하다. 뉴욕, 워싱턴 D.C., 보스턴만 이어도 일정이 꽉 찬다. 그런데 하루쯤은 대도시의 속도를 내려놓고 작은 역에서 내리면, 여행의 표정이 꽤 달라진다. 사진으로 자랑하기 좋은 곳은 아닐 수 있다. 대신 오래 앉아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고, 길 하나를 잘못 들어도 그 자체로 괜찮은 동네가 있다.
뉴욕에서 기차로 벗어나 본 허드슨 강변 동네
뉴욕에 머물 때 가장 편했던 짧은 탈출지는 허드슨 강을 따라 올라가는 작은 마을들이었다. 나는 그중 콜드스프링과 비컨을 걸었다. 맨해튼 중심부에서 기차로 1시간 20분에서 1시간 40분 정도 걸렸고, 창밖으로 강과 나무가 번갈아 지나가서 이동 시간도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콜드스프링은 역에서 내려 바로 중심 거리까지 걸을 수 있었다. 길은 길지 않다. 오래된 벽돌 건물, 작은 골동품 가게, 동네 식당이 이어지고, 조금만 방향을 틀면 강가 산책로가 나온다. 유명 관광지처럼 동선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좋았다. 오전 10시 전에는 문을 연 가게가 많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오히려 마을의 소리가 잘 들렸다. 컵 부딪히는 소리, 트럭이 물건을 내리는 소리, 강 쪽에서 올라오는 바람 같은 것들.
비컨은 콜드스프링보다 조금 더 크고, 예술가 동네의 분위기가 있었다. 메인 스트리트 양쪽으로 작은 갤러리와 빈티지 숍, 커피 가게가 띄엄띄엄 이어진다. 다만 주말 오후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조용한 시간을 원한다면 평일 오전이나 토요일 이른 시간이 낫다. 나는 오전에 도착해 커피 한 잔을 들고 천천히 걸었는데, 2시간 정도면 중심가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었다.
보스턴보다 낮은 목소리의 프로비던스
보스턴 일정 중 하루를 비워 프로비던스로 내려갔다. 기차로 40분 안팎이라 당일치기로 부담이 적었다. 처음엔 작은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걸어보니 대학가와 오래된 주택가, 강변 길이 느슨하게 겹쳐 있었다. 관광지의 밀도보다 생활의 밀도가 더 높은 곳이었다.
프로비던스에서 좋았던 곳은 번화가보다 칼리지 힐 쪽이었다. 언덕길을 따라 벽돌집과 나무 계단이 이어지고, 집 앞 정원에는 계절감이 꽤 또렷했다. 미국 동부 도시 특유의 오래된 분위기가 있지만, 보스턴 중심부처럼 계속 밀려다니는 느낌은 덜했다. 걷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점심은 현지 학생들이 많이 가는 작은 식당에서 먹었다. 메뉴판도 특별할 것 없고, 내부도 화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혼자 앉아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고, 직원이 물을 채워주는 타이밍까지 느긋했다. 여행 중 이런 식당을 만나면 괜히 마음이 풀린다. 비싼 맛보다 동네의 리듬을 먹는 기분이 든다.
뉴헤이븐에서 골목과 공원을 같이 걷다
뉴헤이븐은 예일대학교 때문에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많지만, 막상 걷다 보면 학교만 보고 지나치기엔 아쉬운 도시다. 역에서 중심부까지는 도보와 버스를 섞어 움직였다. 대도시처럼 모든 길이 매끈하지는 않아서, 초행이라면 낮 시간에 움직이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내가 오래 머문 곳은 이스트 록 공원 근처였다. 완만한 오르막을 따라 올라가면 도시와 항구 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 자체가 압도적이라기보다, 방금 지나온 주택가와 나무들이 아래로 조용히 펼쳐지는 느낌이 좋았다. 정상 부근에서는 러닝하는 사람, 벤치에 앉아 통화하는 사람, 아이와 걷는 가족이 드문드문 보였다.
뉴헤이븐은 피자도 유명하지만, 나는 그보다 아침 산책이 더 기억난다. 오래된 학교 건물 주변으로 출근하는 사람과 학생들이 섞이고, 카페 앞에는 노트북을 든 사람들이 줄을 선다. 여행자가 무언가를 보러 왔다기보다 잠깐 그 도시의 평일에 끼어든 느낌. 미국동부여행에서 이런 장면은 은근히 귀하다.
사람 적은 미국동부여행을 잡는 작은 기준
한적한 장소를 찾을 때는 유명하지 않은 이름만 고르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실제로 다녀보면 시간대와 이동 방식이 더 중요했다. 작은 동네도 토요일 점심에는 북적이고, 유명 도시 안에서도 월요일 오전 주택가 산책은 꽤 조용하다.
- 기차역에서 걸어서 20분 안에 중심가나 강변이 있는 곳을 고르면 동선이 편하다.
- 평일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가 가장 차분했다. 카페는 열려 있고 단체 여행객은 적었다.
- 관광 명소 3곳보다 동네 하나를 반나절 걷는 일정이 피로가 덜했다.
- 저녁 늦게 낯선 주택가를 오래 걷는 일정은 피했다. 조용함과 안전함은 다르다.
- 식당은 별점보다 현지 사람이 혼자 들어가는 곳을 눈여겨봤다.
실제로 하루 예산도 대도시 중심 일정과 조금 달랐다. 입장료가 거의 들지 않는 대신 기차비와 카페, 간단한 식사 비용이 중심이 됐다. 뉴욕 근교 당일치기는 교통비가 생각보다 올라갈 수 있으니, 오전에 나가 오후 늦게 돌아오는 식으로 시간을 길게 쓰는 편이 낫다. 짧게 찍고 돌아오면 비용에 비해 남는 감각이 적다.
화려하진 않아도 오래 남는 길
사실 이런 여행은 누군가에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큰 랜드마크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기는 맛은 덜하다. 대신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드는 빵집을 발견하고, 공원 벤치에서 30분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생긴다. 나는 그 시간이 여행을 조금 더 내 쪽으로 가져와 준다고 느꼈다.
미국동부여행을 다시 간다면 유명 도시를 완전히 빼지는 않을 것 같다. 뉴욕의 박물관도, 보스턴의 오래된 거리도 분명 좋다. 다만 일정의 한 칸은 꼭 비워두고 싶다. 기차표 하나 끊어서 작은 역에 내리고, 중심가를 지나 강변이나 언덕으로 걸어가는 시간. 남들이 많이 말하지 않는 장소일수록, 이상하게 내 여행의 목소리는 더 또렷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