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KIA 타이거즈 경기를 보다가 9회에 정해영 이름이 다시 올라오는 장면에서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예전 같으면 익숙한 루틴처럼 받아들였을 장면인데, 최근 몇 시즌의 흔들림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손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구단과 벤치가 정해영 보직 고수를 쉽게 내려놓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감정이 아니라 기록을 놓고 보면, 이 선택은 꽤 복잡한 계산 위에 서 있다.
왜 계속 정해영인가
정해영은 이미 KIA 타이거즈 역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올라선 투수다. 2025년 5월 두산전에서 통산 133세이브를 기록하며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최다 세이브 기록을 새로 썼다. 선동열의 132세이브를 넘어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보직이 단순한 현재 컨디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마무리 투수는 좋은 공만으로 맡는 자리가 아니다. 9회, 1점 차, 중심타선, 만원 관중, 전날 블론의 기억까지 한꺼번에 올라오는 자리다. 정해영은 2021년부터 꾸준히 그 압박을 버텨온 투수다. 2024년에는 53경기 31세이브, 평균자책점 2.49를 기록했고 KIA의 통합 우승 시즌에서 뒷문을 맡았다. 이 정도 이력은 벤치가 쉽게 지우기 어렵다.
그런데 불안도 숫자로 남았다
문제는 팬들의 불안 역시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는 점이다. 2025년 정해영은 60경기 61⅔이닝에서 3승 7패 27세이브, 평균자책점 3.79를 남겼다. 숫자만 보면 완전히 무너진 시즌은 아니다. 27세이브는 여전히 리그 상위권 마무리에게 어울리는 생산성이다.
하지만 세부 흐름은 꽤 거칠었다. 4월에는 9경기 9⅔이닝 평균자책점 0.00으로 다시 안정감을 찾는 듯했다. 5월에도 12경기 14이닝 평균자책점 2.57로 버텼다. 그런데 6월 평균자책점 4.61, 7월 6.23, 8월 9.00으로 내려앉았다. 특히 2025년 블론세이브 7개는 이전 개인 최다였던 4개를 훌쩍 넘긴 수치였다. 팬들이 9회를 편하게 못 본 이유가 여기 있다.
구속 저하는 체감보다 더 컸다
정해영의 상징은 묵직한 직구였다. 그런데 2025년 후반기에는 직구 평균 구속이 142km대까지 떨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마무리 투수에게 직구 구속은 단순한 스피드건 숫자가 아니다. 타자가 직구를 의식해야 슬라이더와 포크볼이 산다. 직구가 덜 위협적이면 변화구도 같이 읽힌다. 그 순간 9회는 투수에게 훨씬 좁은 공간이 된다.
보직 고수는 고집일까, 관리일까
솔직히 정해영 보직 고수를 두고 팬 의견이 갈리는 건 자연스럽다. 당장 결과가 안 나오면 마무리를 바꿔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KIA처럼 우승 경험이 있는 팀은 한 경기의 무게가 더 커진다. 8회까지 앞서다 9회에 놓치는 경기는 단순한 1패가 아니라 더그아웃 전체의 리듬을 건드린다.
그런데 마무리 교체는 버튼 하나 누르는 일처럼 간단하지 않다. 새 마무리를 세우면 기존 필승조 순서가 바뀐다. 7회와 8회를 막던 투수가 9회로 올라가고, 그 앞 이닝을 누가 책임질지도 다시 계산해야 한다. 전상현, 장현식 같은 이름이 있던 시절과 달리 불펜 뎁스가 매년 같은 컨디션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벤치는 정해영의 회복 가능성과 대체 카드의 안정성을 동시에 재야 한다.
- 정해영은 이미 장기간 마무리 경험을 가진 투수다.
- 통산 세이브 기록은 KIA 내부에서 대체하기 어려운 자산이다.
- 부진 구간은 뚜렷했지만, 회복 구간도 분명히 있었다.
- 마무리 교체는 9회 한 자리만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팬들이 보고 싶은 건 이름값보다 납득이다
정해영을 계속 9회에 세우려면 필요한 건 믿음이라는 말만이 아니다.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사용 방식이 따라와야 한다. 연투 관리, 구속 회복 여부, 좌우 타자 상대 패턴, 변화구 비율 같은 디테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직구 구위가 살아나지 않은 날에도 같은 방식으로 9회를 맡긴다면 그건 신뢰가 아니라 방치처럼 보일 수 있다.
반대로 구속이 회복되고,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올라가고, 슬라이더나 포크볼로 헛스윙을 만들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무리 투수의 평가는 늘 잔인하게 현재형이다. 어제까지 쌓은 세이브가 오늘의 1점 차를 자동으로 지켜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과거의 성공 경험은 위기에서 다시 올라올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KIA의 선택은 리스크를 안고 가는 선택이다
KIA 타이거즈가 정해영 보직 고수를 택한다면, 그건 가장 안전한 길이라서가 아니라 가장 회복 가치가 큰 길이라고 보는 쪽에 가깝다. 이미 검증된 마무리가 살아나면 불펜 전체가 제자리를 찾는다. 반대로 계속 흔들리면 그 부담은 순위 싸움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선택은 낭만도 아니고 무작정 믿음도 아니다. 기록을 가진 투수에게 다시 기록으로 증명할 시간을 주는 일이다.
나는 정해영의 9회를 볼 때마다 이제는 세이브 숫자만 보지 않게 된다. 첫 타자와의 승부, 직구 끝, 포수 미트가 밀리는 느낌, 벤치가 준비시키는 다음 투수까지 같이 보게 된다. 좋은 마무리는 팀의 마지막 문장 같은 존재다. KIA가 그 문장을 아직 정해영에게 맡기고 있다면, 이제 필요한 건 이름값을 지키는 투구가 아니라 다시 납득을 쌓는 투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