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 삼척 죽서루, 시간의 풍경을 걷다
삼척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바다가 연상됩니다. 푸른 동해와 긴 백사장, 파도와 항구가 익숙한 풍경이지만, 가을이 되면 삼척 여행의 시선은 바다에서 도시 안쪽으로 자연스레 옮겨갑니다. 그 중심에는 오랜 역사를 품은 죽서루가 자리합니다.
가을 여행의 매력은 풍경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여름의 바쁜 일정과 달리, 선선한 가을바람 속에서는 걷다가 멈추고, 앉아 사색하는 여유가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죽서루는 그런 느린 여행의 속도와 잘 어울리는 장소입니다.
죽서루는 고려시대에 처음 세워졌으며, 조선 태종 때인 1403년 삼척부사 김효손이 옛터에 다시 지었습니다. 이후 1530년과 1788년에 증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고, 2023년 12월 28일 국보로 지정되어 건축적·역사적·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죽서루는 단순히 높은 곳에서 경치를 감상하는 누각이 아닙니다. 자연 암반 위에 건물을 올리고, 바위의 높이에 맞춰 기둥을 세운 독특한 구조로, 자연과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22개의 기둥 중 13개가 자연 암반 위에 놓여 있어, 땅을 바꾸기보다 건물이 자연에 적응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누각에 앉으면 기둥 사이로 오십천과 산, 하늘이 액자처럼 나뉘어 들어옵니다. 이 풍경은 관동팔경 중 하나로 오랫동안 사랑받아 왔으며,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이 그 특별함을 증명합니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초록에서 노랑, 붉은빛으로 변하는 주변 산과 낙엽, 그리고 오십천 위로 내려앉는 빛은 계절의 변화를 선명하게 느끼게 합니다.
죽서루의 기둥들은 높이가 조금씩 다르지만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이는 균형이란 모든 것을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을 인정하며 오래 버티는 것임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누각 안에는 율곡 이이 등 여러 문인들의 글과 현판이 걸려 있어, 과거 이곳을 찾았던 이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서루 아래로 흐르는 오십천과 절벽, 멀리 이어지는 산의 선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완성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 사람들이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가을 삼척 여행에서 죽서루를 추천하는 이유가 됩니다.
삼척에는 바다, 케이블카, 동굴, 해변 등 다양한 여행지가 있지만, 죽서루는 잠시 앉아 사색할 수 있는 여유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죽서루 방문 후에는 삼척도호부 관아지를 천천히 걸으며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도시의 시간을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는 것뿐 아니라 알고 있던 것을 다르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여름의 삼척이 바다를 먼저 보여준다면, 가을의 삼척은 시간을 보여줍니다. 오십천은 여전히 흐르고, 죽서루는 그 자리를 지키며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맞이합니다.
가을날 죽서루에 올라 오십천을 바라보며 사진 몇 장을 찍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뭇잎이 흔들리며 강물이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여행의 가치가 느껴집니다. 삼척의 가을은 빠르게 소비하는 여행보다 천천히 음미하는 여행에 더 어울리는 곳입니다.
삼척 죽서루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