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24평 아파트 주방을 손봤는데, 의외로 문제는 물건 양이 아니었습니다. 정리함이 너무 많았어요. 서랍 안에는 작은 바구니가 다섯 개, 싱크대 하부장에는 회전 트레이와 깊은 박스가 섞여 있었고, 조리대 위에는 예쁜 양념통 세트가 줄지어 있었죠. 보기에는 꽤 부지런한 주방 같았지만 실제로는 냄비 하나 꺼내려면 앞의 통 세 개를 먼저 치워야 했습니다. 주방 정리함은 많이 넣는 도구가 아니라, 손이 덜 가게 만드는 도구여야 합니다.
주방 정리함을 사기 전에 먼저 볼 것
저는 현장에서 정리함을 바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루 동선을 봅니다. 물컵은 어디서 꺼내는지, 밥그릇은 식기세척기에서 나와 어디로 가는지, 라면은 누가 가장 자주 먹는지 같은 것들이요. 주방은 예쁜 구역보다 반복되는 행동이 더 중요합니다. 매일 3번 쓰는 물건이 허리를 숙여야 나오는 곳에 있으면 아무리 비싼 정리함을 넣어도 금방 흐트러집니다.
가장 쉬운 기준은 사용 빈도입니다. 매일 쓰는 것은 어깨부터 허리 높이 사이, 주 1~2회 쓰는 것은 위쪽장이나 하부장 안쪽, 계절용 그릇과 대형 냄비는 손이 조금 불편한 자리로 보내도 괜찮습니다. 이 기준만 잡아도 정리함 개수가 줄어듭니다. 사실 주방이 지저분해 보이는 이유는 물건이 많아서라기보다, 자주 쓰는 물건과 가끔 쓰는 물건이 같은 자리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싱크대 하부장에는 깊은 박스보다 낮은 트레이
싱크대 아래는 습기와 배관 때문에 정리 난도가 높은 곳입니다. 여기에는 뚜껑 있는 깊은 박스를 여러 개 넣는 것보다, 낮은 트레이나 손잡이 있는 바구니가 오래 갑니다. 깊은 박스는 처음엔 많이 들어가서 좋아 보이지만, 바닥에 깔린 세제 리필이나 수세미 묶음은 금방 잊힙니다. 6개월 뒤 같은 제품을 또 사게 되는 경우도 많고요.
하부장에는 높이 10~15cm 정도의 바구니를 추천합니다. 세제, 비닐, 행주, 청소용품처럼 종류가 다른 물건은 한 바구니에 섞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왼쪽은 설거지 용품, 오른쪽은 청소 용품, 문 안쪽은 쓰레기봉투처럼 역할을 나누면 가족도 따라오기 쉽습니다. 정리의 성패는 설명 없이도 알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배관 주변은 딱 맞는 제품보다 3~5cm 여유 있는 바구니가 편합니다.
- 물기가 닿는 곳은 패브릭보다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코팅 철제가 낫습니다.
- 리필 제품은 포장을 모두 남기지 말고 1개 단위로 세워 보관해야 재고가 보입니다.
서랍 정리함은 칸보다 깊이가 먼저입니다
수저 서랍을 보면 칸이 많은 정리함을 사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칸이 많다고 꼭 편한 건 아닙니다. 젓가락 길이보다 짧은 칸, 국자 머리가 걸리는 칸, 아이 수저와 어른 수저가 애매하게 섞이는 칸은 결국 빈틈을 만듭니다. 저는 서랍 정리함을 고를 때 가로폭보다 깊이를 먼저 봅니다. 손이 들어가서 꺼내기 쉬운지, 긴 조리도구가 비스듬히 눕지 않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일반적인 아파트 주방 서랍은 안쪽 깊이가 40~45cm 정도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정리함이 30cm밖에 안 되면 뒤쪽에 애매한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에는 배달용 숟가락이나 고무줄 같은 잡동사니가 쌓입니다. 가능하면 서랍 깊이에 맞춰 80% 이상 채워지는 모듈을 고르세요. 단, 딱 맞게 꽉 채우면 청소가 힘드니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여유는 남기는 편이 좋습니다.
칸 나누기는 가족 수에 맞춰야 합니다
4인 가족인데 수저통 칸이 두 개뿐이면 매일 뒤섞입니다. 반대로 1인 가구인데 8칸짜리 수저함을 넣으면 칸만 남습니다. 주방 정리함은 생활 규모와 맞아야 합니다. 1~2인 가구는 수저, 조리도구, 커피 용품처럼 큰 덩어리로 나누는 방식이 편하고, 3인 이상 가족은 아이용, 어른용, 손님용처럼 사용자를 나누는 방식이 오래 유지됩니다.
양념통 정리함은 예쁨보다 리필 주기를 보세요
조리대 위에 같은 양념통을 맞춰 놓으면 확실히 깔끔해 보입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다만 모든 양념을 옮겨 담는 방식은 생각보다 부지런해야 유지됩니다. 고춧가루, 설탕, 소금처럼 자주 쓰고 양이 일정한 것은 통일해도 좋지만, 굴소스나 멸치액젓처럼 병 모양이 제각각이고 냄새가 남는 제품은 원래 용기 그대로 두는 편이 낫습니다.
양념 정리함은 회전형, 계단형, 서랍형으로 많이 나뉩니다. 상부장 안쪽에는 계단형이 내용물을 보기 쉽고, 깊은 팬트리에는 손잡이 있는 서랍형 바구니가 편합니다. 조리대 위 회전형은 매일 쓰는 5개 안팎의 양념만 올릴 때 예쁩니다. 10개가 넘어가면 돌릴 때마다 병이 부딪히고, 닦아야 할 면적도 늘어납니다. 솔직히 주방은 먼지만 쌓이는 공간이 아니라 기름때가 붙는 공간이라서, 밖에 꺼내 놓는 물건은 적을수록 좋습니다.
- 라벨은 앞면보다 뚜껑 위에 붙이면 서랍 안에서도 보입니다.
- 투명 용기는 재고 확인에 좋지만 햇빛이 드는 곳에는 맞지 않습니다.
- 가루류는 입구가 넓은 용기, 액체류는 원래 병 보관이 실패가 적습니다.
예산을 쓴다면 이 순서가 낫습니다
같은 5만 원을 쓴다면 저는 예쁜 양념통 세트보다 서랍 내부 모듈과 하부장 바구니에 먼저 씁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조리대 위는 치우면 바로 효과가 보이지만, 서랍과 하부장은 한 번 엉키면 매일 작은 스트레스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이 잘 잡혀야 겉도 오래 갑니다.
처음부터 전부 바꾸려고 하면 비용도 커지고 실패 확률도 올라갑니다. 싱크대 하부장 1곳, 수저 서랍 1곳, 양념 구역 1곳만 먼저 잡아도 충분합니다. 2주 정도 살아본 뒤 불편한 지점을 다시 보세요. 정리함은 사는 순간 완성되는 물건이 아니라, 생활에 맞춰 조금씩 맞춰 가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피해야 할 선택도 있습니다
너무 얇은 아크릴 정리함은 사진에는 예쁘지만 깨짐과 스크래치가 빨리 옵니다. 깊은 흰색 박스는 깔끔해 보이지만 안에 든 물건이 보이지 않아 중복 구매가 생기기 쉽습니다. 접이식 정리함은 이사나 임시 보관에는 좋지만 매일 여닫는 주방에서는 형태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오래 쓰는 제품은 대단히 특별한 물건이 아닙니다. 손잡이가 편하고, 닦기 쉽고, 안에 든 물건이 보여야 합니다.
주방 정리함을 잘 고른 집은 조리대가 비어 보이는 것보다 사람이 덜 움직입니다. 컵을 꺼내고, 밥을 담고, 냄비를 넣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저는 그런 주방이 오래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 집이 아니라, 제자리로 돌아가기 쉬운 집. 그 차이가 매일 저녁의 피로를 꽤 많이 줄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