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세탁기 앞에서 양말 한 짝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 분명 빨래를 했는데 짝이 안 맞고, 건조대는 이미 꽉 찼고, 나는 또 “왜 우리 집은 이런 사소한 일이 계속 꼬이지?”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개발자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문제가 반복되면 의지를 탓하기 전에 시스템을 봐야 해.” 그 말이 은근히 생활에도 잘 맞았다.
개발자라는 키워드는 보통 코딩, 야근, 모니터 여러 대 같은 이미지로 떠오른다. 그런데 옆에서 보면 그 사람들이 진짜 자주 하는 일은 코드를 쓰는 것보다 문제를 작게 쪼개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집안의 작은 불편을 개발자식으로 다뤄봤다. 거창한 도구는 쓰지 않았다. 메모 앱, 타이머, 붙임쪽지 정도면 충분했다.
문제부터 크게 말하지 않기
처음엔 “집이 너무 어수선하다”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문장은 너무 크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니 계속 미루게 된다. 개발자식으로 바꾸면 “퇴근 후 식탁 위에 물건이 평균 9개 쌓인다”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숫자가 들어가니 갑자기 문제가 작아졌다.
나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저녁 9시에 식탁 위 물건을 세었다. 첫날 11개, 둘째 날 8개, 셋째 날 10개였다. 대부분은 우편물, 영수증, 충전 케이블, 마시다 둔 컵이었다. “정리해야지”가 아니라 “식탁에 올라오는 물건의 임시 도착지를 만들자”로 방향이 바뀌었다.
바꿔본 방식
- 우편물은 현관 옆 바구니 하나에만 넣기
- 영수증은 지갑에서 꺼내는 즉시 사진 찍고 버리기
- 충전 케이블은 식탁이 아니라 콘센트 옆 집게에 걸기
- 컵은 자기 전 싱크대로 옮기는 1분 타이머 걸기
이렇게 하고 나니 금요일 밤 식탁 위 물건은 3개였다. 완벽히 깨끗한 집이 된 건 아니다. 다만 “왜 또 어질러졌지”라는 짜증이 줄었다. 문제를 작게 부르니까 해결도 작게 움직였다.
버그 리포트처럼 생활 불편을 적어보기
개발자는 오류가 나면 “안 됨”이라고만 쓰지 않는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적는다. 그래서 나도 생활 속 불편을 버그 리포트처럼 써봤다.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예를 들어 아침마다 늦는 문제를 예전엔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로 넘겼다. 그런데 실제로 적어보니 달랐다. 늦는 날은 대부분 양말을 찾는 데 4분, 텀블러 뚜껑을 찾는 데 3분, 날씨 확인 후 옷을 다시 고르는 데 5분 정도가 빠졌다. 잠을 30분 더 자서 생긴 일이 아니라 작은 대기 시간이 계속 쌓인 셈이다.
그래서 전날 밤에 하는 일을 3개만 정했다. 양말은 문 앞 서랍에 넣고, 텀블러는 뚜껑까지 닫아 가방 옆에 두고, 날씨는 자기 전 한 번만 확인했다. 출근 준비 시간은 평균 38분에서 29분으로 줄었다. 9분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아침의 9분은 체감상 꽤 크다. 커피를 마실지 말지 다투던 마음이 사라졌다.
한 번에 고치지 않고 버전처럼 바꾸기
생활 문제를 고칠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한 번에 전부 바꾸는 것이다. 나도 여러 번 그랬다. 냉장고 정리, 운동, 가계부, 수면 패턴을 동시에 시작했다가 사흘 뒤 전부 흐지부지된 적이 많다. 개발자 친구는 이걸 보고 “기능을 너무 많이 배포했다”고 했다. 표현이 웃겼지만 맞는 말이었다.
이번에는 버전처럼 바꿨다. 첫 번째 버전은 냉장고 문 앞에 유통기한 임박 칸을 만드는 것뿐이었다. 두 번째 버전은 일요일 저녁에 그 칸만 확인하는 것. 세 번째 버전은 확인한 재료로 월요일 저녁 메뉴 하나를 정하는 것이었다. 냉장고 전체를 뒤집지 않았는데도 버리는 채소가 줄었다.
실제로 지난달에는 상한 재료를 6번 버렸고, 이번 주에는 시든 깻잎 한 묶음만 버렸다. 돈으로 치면 큰 절약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느끼던 작은 죄책감이 줄었다. 생활 개선은 가끔 비용보다 기분의 낭비를 줄이는 쪽에 더 가깝다.
자동화보다 먼저 마찰 줄이기
개발자 하면 자동화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생활에서는 자동화보다 마찰을 줄이는 게 더 빠를 때가 많았다. 예를 들어 운동 앱을 깔고 알림을 세 개 만들기보다, 운동복을 의자에 걸어두는 쪽이 내게는 훨씬 잘 먹혔다.
나는 퇴근 후 스트레칭을 자꾸 빼먹었다. 이유는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 매트를 꺼내기 귀찮고, 동작 영상을 찾다가 다른 영상을 보게 되고, 그러다 시간이 지나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정을 줄였다. 매트는 접지 않고 침대 옆에 세워두고, 동작은 딱 5개만 종이에 써서 벽에 붙였다. 타이머는 7분으로 고정했다.
일주일 중 5일을 했다. 이전에는 마음먹고도 2일을 넘기기 어려웠다. 솔직히 운동 효과가 엄청났다고 말하긴 어렵다. 대신 “나는 또 못 했다”는 생각이 줄었다. 개발자식으로 말하면 실행 버튼까지 가는 클릭 수를 줄인 느낌이었다.
생활에도 로그가 있으면 덜 억울하다
가장 의외였던 건 기록이었다. 개발자는 로그를 보고 문제가 생긴 지점을 찾는다. 생활도 비슷했다. 기분이 안 좋거나 일이 밀렸을 때, 그냥 하루가 엉망이라고 느끼면 억울하다. 그런데 기록을 보면 원인이 조금 보인다.
나는 일주일 동안 밤에 세 줄만 썼다. 오늘 막힌 일 하나, 잘 풀린 일 하나, 내일 줄일 마찰 하나. 수요일 기록에는 “설거지가 밀림, 점심 도시락은 성공, 내일은 냄비를 바로 물에 담그기”라고 적혀 있었다. 다음 날 냄비를 물에 담갔더니 설거지 시간이 14분에서 8분으로 줄었다. 별것 아닌 변화인데 손에 닿는 차이가 있었다.
개발자처럼 산다는 게 모든 걸 효율로만 보자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생활을 조금 덜 혼내고, 더 잘 관찰하는 방식에 가까웠다.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왜 이 모양이지”로 가지 않고 “어느 단계에서 자꾸 막히지”라고 묻는 것. 그 질문 하나만 바뀌어도 일상이 덜 피곤해졌다. 나는 당분간 이 방식을 계속 써볼 생각이다. 작은 불편을 고치는 일은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