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고척에서 열린 박병호 은퇴식 장면을 다시 보는데, 이상하게도 홈런 장면보다 등번호 52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선수는 유니폼을 벗었지만 번호는 아직 완전히 내려오지 않은 느낌이었다. 박병호 영구결번 이야기가 팬들 사이에서 계속 나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단순히 오래 잘한 선수를 예우하자는 감정보다, 히어로즈가 자기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 남길 것인가의 문제에 더 가깝다.
은퇴식은 끝났지만 52번은 비어 있다
2026년 4월 26일, 키움은 고척 삼성전에서 박병호의 은퇴식을 열었다. 그때 공식 영구결번 발표는 없었다. 근데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다. 박병호가 2021시즌 뒤 키움을 떠난 뒤에도 히어로즈에서 52번을 새로 단 선수는 없었다. 구단이 단어를 꺼내지 않았을 뿐, 팬들이 체감한 52번은 이미 특별 관리에 가까웠다.
현재 박병호는 키움 잔류군 선임코치로 돌아와 다시 52번을 달고 있다. 선수 시절의 번호를 지도자가 계속 쓰는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아직 공식 영구결번은 아니지만, 이 번호가 아무나 쓰는 숫자는 아니라는 메시지는 충분히 전해진다. 그래서 더 애매하고, 그래서 더 뜨겁다.
숫자로 보면 논쟁이 자연스럽다
KBO 기록의 큰 줄기만 놓고 봐도 박병호는 영구결번 후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은퇴 발표 당시 통산 1767경기, 타율 0.272, 1554안타, 418홈런, 1244타점, OPS 0.914. 은퇴식 특별 출전까지 반영하는 기록 서비스에서는 경기 수가 1768경기로 잡히기도 한다. 어느 쪽을 보든, 418이라는 홈런 숫자는 KBO 거포 계보에서 빠질 수 없는 흔적이다.
특히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은 뒤 폭발한 흐름이 중요하다. 2011년 트레이드로 넥센에 온 뒤 2012년 31홈런, 2013년 37홈런, 2014년 52홈런, 2015년 53홈런을 때렸다. 4시즌 연속 홈런왕, 2년 연속 50홈런은 리그 문법을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목동구장의 작은 이미지로만 설명하기엔 너무 긴 시간, 너무 높은 반복성이 있었다.
상징을 만든 기록들
- 정규시즌 MVP 2회, 1루수 골든글러브 6회, 홈런왕 6회.
- 2014년 52홈런과 2015년 53홈런으로 완성한 KBO 최초 2년 연속 50홈런 시즌.
- 2024년 9월 4일 삼성 소속으로 기록한 KBO 통산 400호 홈런, 당시 역대 세 번째 달성.
- 2022년 kt에서 35홈런을 때리며 만든 개인 여섯 번째 홈런왕 타이틀.
그런데 신중론도 그냥 핑계는 아니다
솔직히 팬심만 놓고 보면 52번을 바로 올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구단이 망설이는 이유도 완전히 가볍지는 않다. 박병호는 LG에서 데뷔했고, 히어로즈에서 전성기를 보냈으며, 미국 미네소타를 거쳐 키움으로 돌아온 뒤 kt와 삼성에서도 뛰었다. 원클럽맨이라는 전통적 기준으로 보면 빈틈이 있는 커리어다.
또 히어로즈는 아직 영구결번이 없는 구단이다. 첫 사례는 뒤의 사례까지 끌고 간다. 김하성, 이정후처럼 포스팅으로 해외에 나간 또 다른 상징들도 남아 있고, 언젠가 돌아와 더 긴 이야기를 쓸 가능성도 있다. 구단 입장에서는 첫 번호를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줄지 쉽게 못 박기 어렵다.
다만 영구결번이 늘 원클럽맨에게만 허락된 의식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선수가 특정 구단의 기억을 얼마나 강하게 대표하느냐다. 박병호를 떠올릴 때 많은 팬이 LG의 미완성 유망주보다 넥센과 키움의 4번 타자를 먼저 떠올린다. 이 감각 자체가 논쟁의 출발점이다.
52번이 히어로즈 첫 영구결번이 된다면
내가 박병호 영구결번 이야기를 흥미롭게 보는 이유는, 이게 단순한 예우 싸움이 아니라 히어로즈라는 팀의 서사를 세우는 일이라서다. 히어로즈는 창단 이후 선수 육성과 트레이드, 포스팅, 세대교체의 속도가 유독 빨랐다. 그래서 팬들에게 남는 상징이 더 절실하다.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다른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까지 품을 수 있느냐가 이 팀의 역사 감각을 보여준다.
52번이 영구결번이 된다면 메시지는 꽤 선명하다. 히어로즈는 완벽하게 한곳에만 머문 선수보다, 이 팀에서 자신의 야구를 완성하고 리그의 시대를 흔든 선수를 기억하겠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더 기다린다면, 구단은 첫 영구결번을 더 엄격한 프랜차이즈 기준으로 남기겠다는 태도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기준을 팬들에게 납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52번이 언젠가 고척 외야 어딘가에 걸려도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박병호의 커리어는 깔끔한 직선은 아니었지만, 히어로즈에서 만든 고점은 너무 크고 선명했다. 홈런은 점수판에 1점 이상을 남기지만, 어떤 홈런 타자는 구단의 기억 방식까지 바꾼다. 박병호의 52번은 이미 그런 숫자에 가까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