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법원 입찰장에서 전세 낀 빌라 물건을 하나 봤습니다. 감정가 2억 4천만 원, 최저가 1억 6천만 원대라 숫자만 보면 꽤 싸 보였죠. 그런데 매각물건명세서를 넘겨보니 선순위 임차인 보증금이 1억 8천만 원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 물건은 싸게 사는 물건이 아니라, 남의 전세보증금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됐습니다.
전세라는 단어는 임차인에게도 무겁지만, 경매 투자자에게도 절대 가볍지 않습니다. 특히 초보 때는 최저가가 많이 떨어진 물건을 보면 눈이 먼저 갑니다. 저도 예전엔 그랬습니다. 근데 현장에서 몇 번 당해보면 압니다. 가격이 떨어진 데는 이유가 있고, 전세 낀 물건은 그 이유가 서류 한 줄에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세 낀 물건에서 먼저 보는 건 시세가 아닙니다
초보 투자자는 보통 감정가와 최저가부터 봅니다. 3억짜리가 2억까지 떨어졌네, 이 정도면 남겠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전세가 끼어 있으면 순서가 바뀝니다. 저는 먼저 임차인의 전입일, 확정일자, 배당요구 여부를 봅니다. 그다음 말소기준권리보다 앞서는지 뒤서는지를 따집니다.
예를 들어 근저당 설정일이 2021년 5월 10일이고, 임차인 전입일이 2020년 12월 3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임차인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면 낙찰자가 보증금을 떠안는 구조가 될 수 있습니다. 최저가가 1억 5천만 원이어도 인수해야 할 전세보증금이 1억이면 실제 매입가는 2억 5천만 원으로 보는 게 맞습니다.
대법원 법원경매정보의 매각물건명세서, 현황조사서, 감정평가서를 같이 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 중 하나만 보고 들어가면 빈칸을 상상으로 메우게 됩니다. 경매에서 상상은 돈으로 벌을 받습니다.
선순위 임차인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제가 초보 시절에 가장 늦게 배운 게 이 부분입니다. 서류에는 임차인, 보증금, 전입일 정도로 적혀 있지만 실제 현장에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보증금을 못 돌려받은 사람, 이사 갈 돈이 막힌 사람, 집주인과 몇 달째 싸운 사람이 있습니다. 낙찰자는 법적으로 새 소유자일 수 있어도, 현장에서는 갑자기 찾아온 낯선 사람입니다.
전세보증금 1억 2천만 원짜리 선순위 임차인이 있는 빌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최저가는 9천만 원까지 내려왔고, 겉으로는 싸 보였습니다. 하지만 보증금 인수 가능성을 계산하면 이미 수익은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임차인이 배당을 전액 못 받는 구조였다는 겁니다. 낙찰 후 명도도 길어질 가능성이 컸죠.
- 전입일이 말소기준권리보다 빠른지 확인합니다.
- 확정일자와 배당요구 종기 내 배당요구 여부를 함께 봅니다.
- 보증금 전액 배당 가능성이 있는지 배당표를 가정해봅니다.
- 인수금이 있으면 낙찰가에 더해서 실제 매입가를 다시 계산합니다.
이 네 가지를 놓치면 낙찰받고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잔금 넣기 전부터 머릿속 계산기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전세가율 높은 빌라는 더 보수적으로 봐야 합니다
요즘도 빌라나 다세대 물건을 보면 전세가율이 높은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매매가 2억 2천만 원인데 전세가 2억에 가까운 집은 경매로 넘어왔을 때 구조가 빡빡합니다. 집값이 조금만 빠져도 임차인 보증금이 매매가를 눌러버립니다.
시세조사는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에서 매매와 전월세 거래를 같이 봅니다. 부동산 중개업소에도 전화합니다. 단, 중개업소 한 곳 말만 믿지 않습니다. 같은 단지, 같은 층수, 같은 전용면적이라도 방향, 주차, 누수, 엘리베이터 유무에 따라 가격이 달라집니다. 빌라는 더 심합니다. 옆 동은 팔리는데 이 동은 안 팔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전세 낀 빌라를 볼 때 최소 세 가지 가격을 따로 적습니다. 급매로 팔릴 가격, 보통 매물로 버틸 가격, 최악의 상황에서 손절할 가격입니다. 수익 계산은 보통 매물 가격이 아니라 급매와 손절 가격 사이에서 합니다. 그래야 시장이 흔들려도 버틸 여지가 생깁니다.
초보라면 이런 전세 물건은 피하는 게 낫습니다
모든 전세 낀 물건이 나쁜 건 아닙니다. 임차인이 후순위이고 배당으로 보증금 회수가 가능하며, 점유 관계가 명확한 물건은 충분히 검토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애매한 물건입니다. 전입세대 열람 내용과 현황조사 내용이 다르거나, 보증금 액수가 주변 전세 시세와 맞지 않거나, 임차인이 여러 명으로 쪼개져 있는 경우는 초보에게 버겁습니다.
특히 다가구주택은 조심해야 합니다. 등기부에는 건물 하나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세대가 살고 있고, 각 세대의 전입일과 보증금이 다릅니다. 한 집처럼 보여도 배당에서는 완전히 다른 판이 벌어집니다. 다가구 전세 물건을 가볍게 보면 잔금보다 명도와 인수금에서 크게 흔들립니다.
- 선순위 임차인 보증금이 낙찰가보다 큰 물건
- 전입일이 빠른데 배당요구 여부가 불명확한 물건
- 현황조사서에 미상, 폐문, 점유자 불명 표시가 많은 물건
- 주변 전세 시세보다 보증금이 과하게 높은 물건
- 다가구인데 임차인 내역이 깔끔하게 확인되지 않는 물건
이런 물건은 고수익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위험을 떠안는 가격일 때가 많습니다. 경매는 싸게 사는 게임 같지만, 오래 해보니 모르는 돈을 안 떠안는 일이 더 중요했습니다.
입찰가보다 먼저 써야 할 계산서
전세 낀 물건을 볼 때 저는 입찰가를 바로 쓰지 않습니다. 낙찰가, 취득세, 법무비, 명도비, 이자, 수리비, 중개수수료, 보유기간을 먼저 적습니다. 여기에 인수 가능한 전세보증금을 더합니다. 이 숫자를 다 더했는데도 주변 급매보다 10퍼센트 이상 여유가 없다면 보통은 접습니다.
예를 들어 낙찰가 1억 7천만 원, 인수 보증금 3천만 원, 취득세와 비용 700만 원, 수리비 800만 원, 대출이자와 보유비 500만 원이면 이미 총투입액은 2억 2천만 원에 가깝습니다. 주변 급매가 2억 3천만 원이라면 남는 돈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서 명도가 한 달만 밀려도 수익은 더 얇아집니다.
전세 물건은 욕심을 줄여야 보입니다. 낙찰받는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돈을 지키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저는 아직도 전세 낀 물건 앞에서는 한 번 더 멈춥니다. 입찰장 분위기에 휩쓸려 버튼 누르듯 가격을 쓰는 순간, 서류 속 작은 날짜 하나가 몇 년 번 돈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