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결말까지 읽어봤더니, 조용히 뒤통수 맞은 후기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결말까지 읽어봤더니, 조용히 뒤통수 맞은 후기

얼마 전 로맨스 판타지를 가볍게 읽고 싶어서 단권 작품을 골랐는데, 생각보다 마음이 꽤 오래 멈춰 있었다. 제목부터 묘하게 걸렸다.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라니, 뭔가 없던 일을 따지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기억 속에만 남은 시간을 묻는 이야기 같기도 했다.

이 글은 결말 이야기가 들어간다. 아직 작품을 읽기 전이고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고 싶다면 여기서 멈추는 편이 낫다. 다만 나처럼 읽기 전에 대략적인 분위기와 마지막 감정선을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래 내용이 꽤 실용적인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겉으로는 호위 기사와 후궁의 이야기

처음 설정만 보면 익숙한 로판처럼 보인다. 천 년 만에 용을 죽인 영웅 도미닉 레게논은 전쟁을 끝낸 공로를 세웠지만, 왕의 견제 때문에 보상 대신 후궁 아델하이드의 호위 기사로 보내진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권력 다툼, 금지된 감정, 신분 차이 같은 키워드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아델하이드는 단순한 후궁이 아니다. 그녀는 멸망한 헨부르크의 마지막 왕족이고, 자기 나라를 무너뜨린 왕 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도미닉은 처음에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존심도 명예도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읽는 쪽도 초반에는 도미닉의 시선에 조금 끌려간다. 왜 저렇게까지 살아남으려 했을까, 왜 그렇게 비굴해 보이는 선택을 했을까 싶어진다.

근데 이 작품은 바로 그 판단을 천천히 뒤집는다. 도미닉이 아델하이드와 서재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녀가 가진 생각과 태도를 알아갈수록 처음의 혐오는 흔들린다. 작품 소개에서 말하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묘연해진다’는 말이 그냥 분위기용 문장이 아니었다.

결말의 큰 줄기는 회귀와 왕의 죽음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결말을 이해하려면 아델하이드의 비밀을 먼저 봐야 한다. 헨부르크 왕족에게는 ‘고결한 피를 지닌 자손의 대가 끊기지 않는다’는 용의 축복이 내려져 있다. 말만 보면 축복인데, 아델하이드에게는 거의 저주다. 죽음의 순간을 반복해서 겪고, 여러 번의 삶을 통과하며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델하이드가 굴욕을 견딘 이유도 여기서 달라 보인다. 그녀는 그냥 무너진 사람이 아니라,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계속 선택해온 사람에 가깝다. 도미닉이 보지 못한 시간, 다른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 하지만 아델하이드에게는 분명히 있었던 일들이 그녀를 만든다.

후반부에서 아델하이드는 왕을 시해한다. 그리고 도미닉은 그녀를 단죄하기보다 용이 있는 세월의 산으로 보내준다. 여기서 도미닉 역시 큰 전환을 맞는다. 그는 명령을 따르는 기사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감당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게다가 도미닉이 선왕의 자식일 가능성이 드러나면서 권력의 자리까지 그에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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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이 본 것은 사랑보다 더 큰 이해

도미닉은 왕이 된 뒤 세월의 산으로 아델하이드를 찾아간다. 이 장면이 작품의 감정적인 중심처럼 느껴졌다. 그는 거기서 아델하이드가 지나온 많은 생을 본다. 자신이 몰랐던 고통, 자신이 쉽게 재단했던 선택, 자신에게는 없었던 시간이 펼쳐진다.

이때 이 작품의 제목이 확 들어온다. ‘일어나지 않은 것들’은 실제로 없던 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도미닉에게는 처음 보는 시간이었지만, 아델하이드에게는 이미 살았고 죽었고 견딘 시간이었다. 그래서 마지막은 단순히 두 사람이 행복하게 이어졌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방식으로만 읽히지 않았다.

물론 로맨스의 흐름은 있다. 도미닉은 아델하이드를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향한 판단을 거둔다. 하지만 더 크게 남는 건 사랑의 고백보다 ‘타인의 삶을 모른 채로 판단했던 사람의 뒤늦은 부끄러움’이었다. 나도 읽으면서 조금 뜨끔했다. 일상에서도 누군가의 선택을 보고 너무 빠르게 말할 때가 있으니까.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 애매한 이유

이 작품의 결말을 딱 잘라 해피엔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드엔딩이라고 보기도 애매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지점에는 닿지만, 그 과정이 너무 많은 상처 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읽고 나면 개운하다기보다 먹먹하다.

개인적으로는 ‘구원은 있지만 가볍지 않은 끝’에 가깝다고 느꼈다. 아델하이드가 지나온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미닉이 늦게나마 알아차렸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누군가가 마침내 그녀의 세계를 보게 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세계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 작품의 마지막 감정이다.

  • 짧은 단권이지만 설정의 밀도가 꽤 높다.
  • 로맨스보다 인물의 판단 변화가 더 오래 남는다.
  • 결말은 속 시원한 복수극보다는 조용한 여운에 가깝다.
  • 스포를 알고 읽어도 후반부 감정선은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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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전에 알면 좋은 감상 포인트

이 작품을 빠른 사건 전개나 달달한 로맨스만 기대하고 읽으면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분위기는 차분하고, 문장은 감정을 크게 터뜨리기보다 꾹 눌러 담는 쪽이다. 그래서 취향에 맞으면 짧은 분량인데도 오래 남고, 반대로 감정선이 느리다고 느끼면 중반까지 답답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내가 본 것만 사실이라고 믿는 습관’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아델하이드의 삶은 겉으로 보면 수치스럽고 비겁해 보일 수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살아남기 위한 계산과 반복된 고통이 있다. 도미닉의 변화도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사랑에 빠진 남자라기보다, 자기 확신이 깨진 사람처럼 보였다.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결말은 누군가에게는 덜 친절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불친절함이 이 이야기와 꽤 잘 맞는다고 느꼈다. 삶이 늘 설명서를 붙여주지는 않으니까. 어떤 사람의 선택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통과한 시간을 봐야 한다는 말이, 판타지 설정을 타고 와서 의외로 현실적인 문장처럼 남았다.

일어나지 않은 것들에 관하여 결말까지 읽어봤더니, 조용히 뒤통수 맞은 후기 -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