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요리교실에서 수강생 한 분이 냉장고 사진을 보여주셨는데, 재료는 제법 많은데 막상 저녁이 되면 라면을 끓이게 된다고 하셨어요. 사실 집밥 식단이 어려운 이유는 요리를 못해서가 아니라, 한 끼마다 새로 생각해야 해서 지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주방에서 오래 일하면서도 집에서는 너무 거창하게 차리려다 실패한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지금은 식단을 짤 때 메뉴 이름보다 밥, 단백질, 채소, 국물의 자리를 먼저 봅니다.
식단은 메뉴보다 자리부터 잡으면 편합니다
일주일 식단을 짤 때 월요일은 제육볶음, 화요일은 된장찌개처럼 메뉴부터 쓰면 금방 막힙니다. 대신 한 끼를 네 칸으로 나눠 보세요. 밥이나 면 같은 주식 1가지, 고기·생선·두부·달걀 같은 단백질 1가지, 데치거나 볶은 채소 1가지, 국이나 김치처럼 입맛을 받쳐주는 것 1가지입니다. 이렇게 잡으면 재료가 조금 부족해도 밥상이 비어 보이지 않습니다.
양은 성인 1인 기준으로 밥 180~210g, 단백질 재료는 생고기나 생선 120~150g, 두부는 반 모 정도가 무난합니다. 채소 반찬은 손질 전 기준 한 줌 반, 대략 100~150g 잡으면 익고 나서 한 접시가 됩니다. 아이가 있거나 어르신이 함께 먹는 집은 밥 양을 조금 줄이고 국물이나 부드러운 반찬을 늘리는 쪽이 편합니다.
장보기는 3일치만 잡아야 덜 버립니다
식단표를 예쁘게 일주일치 꽉 채우면 마음은 든든한데, 실제로는 약속이 생기고 입맛이 바뀌고 피곤한 날이 옵니다. 저는 장보기는 3일치, 냉동실 재료는 2끼 비상용으로 잡는 편입니다. 예를 들면 닭다리살 600g, 두부 1모, 달걀 10개, 애호박 1개, 양파 3개, 콩나물 1봉, 대파 1단이면 세 끼 이상은 충분히 버팁니다.
재료를 겹쳐 쓰면 식단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양파는 닭갈비에도 들어가고 된장찌개에도 들어갑니다. 콩나물은 무침으로 먹고 남으면 다음 날 국으로 끓이면 됩니다. 애호박은 볶음으로 쓰다가 반 개 남으면 달걀물에 넣어 부쳐도 좋아요. 이렇게 한 재료를 두 방향으로 쓰면 냉장고 속 자투리가 줄어듭니다. 단, 향이 강한 깻잎이나 부추는 오래 두면 금방 숨이 죽으니 초반 식단에 배치하는 게 낫습니다.
- 월요일: 밥, 닭다리살 간장볶음, 콩나물무침, 김치
- 화요일: 밥, 두부된장찌개, 애호박볶음, 달걀말이
- 수요일: 밥, 콩나물국, 남은 닭고기 채소볶음, 김
불 세기와 물 양을 식단에 같이 적어두면 실패가 줄어듭니다
식단표에 메뉴 이름만 쓰면 막상 조리할 때 또 헤맵니다. 저는 수업 때도 식단 옆에 불 세기와 물 양을 같이 적으라고 말합니다. 된장찌개라면 물 600ml에 된장 1큰술 반, 중불 8분 뒤 두부 넣고 3분. 콩나물국은 물 700ml에 뚜껑 덮고 중강불 6분, 그 뒤 약불 5분. 이런 식으로 써두면 피곤한 저녁에도 손이 덜 흔들립니다.
특히 볶음요리는 팬을 먼저 달구는 순서가 중요합니다. 팬이 미지근할 때 고기를 넣으면 수분이 먼저 나와서 볶음이 아니라 조림처럼 됩니다. 닭다리살 300g 기준으로 팬을 중강불에서 1분 달군 뒤 기름 1큰술을 두르고, 고기를 넓게 펼쳐 2분은 건드리지 않는 게 좋아요. 그 다음 뒤집고 양파를 넣어야 양파 물이 고기 겉면을 씻어내지 않습니다.
대체 재료는 맛의 역할을 맞춰 고릅니다
식단을 오래 이어가려면 없는 재료 때문에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돼지고기가 없으면 닭고기나 두부로 바꿀 수 있고, 애호박이 없으면 양배추나 버섯으로 넘어가면 됩니다. 다만 양념은 조금 조절해야 합니다. 두부는 고기보다 간이 덜 배기 때문에 간장 양념을 만들 때 간장 1큰술에 물 2큰술을 섞어 끓이듯 졸이면 맛이 편하게 들어갑니다. 양배추는 단맛이 있으니 설탕이나 올리고당은 반으로 줄이는 편이 낫습니다.
국물 메뉴도 마찬가지입니다. 멸치육수가 없으면 맹물에 국간장 1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대파를 조금 넉넉히 넣으면 허전함이 줄어듭니다. 다시마가 있다면 찬물 700ml에 10분 담갔다가 끓이기 전 건져내면 국물이 부드럽습니다. 오래 끓이면 끈적한 맛이 나올 수 있어요. 이런 작은 차이가 집밥 맛을 꽤 크게 바꿉니다.
실패했을 때 바로 살리는 방법도 적어둡니다
식단은 계획표이기도 하지만 수습표이기도 합니다. 찌개가 짜면 물만 붓지 말고 두부나 감자처럼 간을 받아줄 재료를 넣는 게 먼저입니다. 물만 넣으면 양은 늘어나는데 맛이 흐려집니다. 국물 500ml 기준으로 너무 짤 때는 물 100ml와 두부 100g을 같이 넣고 3분만 더 끓이면 훨씬 안정됩니다.
볶음이 질척해졌을 때는 센불로 무작정 날리면 양념이 타기 쉽습니다. 재료를 팬 가장자리로 밀고 가운데 국물을 모은 뒤 중강불에서 1~2분 끓여 농도를 먼저 잡으세요. 그래도 물이 많으면 전분물 1작은술을 넣어 살짝만 묶어줍니다. 반대로 반찬이 싱거우면 소금을 바로 뿌리기보다 간장 몇 방울이나 액젓 1작은술처럼 감칠맛 있는 간을 쓰면 덜 거칠게 맞습니다.
집밥 식단은 멋진 메뉴를 많이 아는 것보다 반복 가능한 흐름을 만드는 쪽이 오래 갑니다. 밥을 짓고, 단백질 하나를 익히고, 채소 하나를 데치거나 볶고, 국물이나 김치로 입맛을 받쳐주는 정도면 충분한 날이 많습니다. 저도 바쁜 날에는 대단한 상을 차리지 않습니다. 대신 물 양과 불 세기, 넣는 순서만큼은 대충 넘기지 않으려 합니다. 그 작은 기준이 쌓이면 냉장고 앞에서 멈칫하는 시간이 확실히 줄어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