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AVC 남자 챔피언스리그 기록표를 다시 보다가 묘하게 오래 멈춘 경기가 있었다. 자카르타 바양카라 프레시시와 현대캐피탈의 2026년 5월 16일 준결승전. 스코어만 보면 현대캐피탈의 0-3 패배인데, 세트 점수는 23-25, 25-27, 23-25였다. 세 세트 모두 손끝 하나 차이였다. 그런데 그 손끝 끝에 서 있던 이름이 케이타와 시몬이었다는 게 이 경기의 맛을 완전히 바꿔놨다.
현대캐피탈 앞에 다시 선 V리그의 기억
케이타 시몬, 현대캐피탈 재회라는 말이 괜히 크게 들리는 게 아니다. 둘 다 V리그 팬들에게는 단순한 외국인 선수가 아니었다. 케이타는 KB손해보험 시절 리그를 거의 혼자 흔들다시피 했고, 시몬은 OK저축은행을 2년 연속 정상으로 끌어올린 괴물 미들블로커였다.
시몬은 2014-15시즌과 2015-16시즌 OK저축은행의 우승을 이끈 선수다. 특히 2015-16시즌 챔피언결정전 상대가 현대캐피탈이었다는 점이 묘하다. 그때도 현대캐피탈은 좋은 팀이었고, 시몬은 그 좋은 팀의 중심을 정면으로 깨뜨렸다. 시간이 흘러 이번엔 인도네시아 클럽 유니폼을 입고 다시 현대캐피탈을 만났다.
케이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다. 2020-21시즌과 2021-22시즌 KB손해보험에서 뛰며 V리그의 득점 감각을 새로 쓴 선수였다. 2021-22시즌에는 1285득점으로 남자부 단일 시즌 최다 득점 기록을 만들었고, 정규리그 MVP도 가져갔다. 그 숫자는 아직도 묵직하다. 많이 때린 선수는 많았지만, 케이타처럼 관중석의 공기까지 바꿔놓은 선수는 드물었다.
숫자로 보면 더 선명한 3세트
이 준결승은 대패처럼 보이지만 내용은 다르다. 현대캐피탈은 매 세트 막판까지 따라붙었다. 1세트는 23-24까지 추격했고, 2세트는 24-23으로 먼저 세트 포인트를 잡았다. 3세트도 15-11 리드를 만들었다. 근데 중요한 순간마다 자카르타 쪽에서 튀어나온 답이 너무 강했다. 케이타의 서브, 케이타의 결정력, 그리고 시몬의 블로킹이었다.
득점 분포가 말한 차이
- 케이타: 24점, 공격 득점 20점, 서브 득점 4점
- 시몬: 13점, 공격 득점 7점, 블로킹 4점, 서브 득점 2점
- 현대캐피탈 주요 득점: 장추안 15점, 허수봉 8점
여기서 눈에 들어오는 건 케이타 혼자 현대캐피탈의 주 득점원 두 명 합계와 거의 맞먹었다는 점이다. 장추안과 허수봉이 합쳐 23점이었고, 케이타는 24점이었다. 물론 배구는 한 명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종목이다. 리시브, 연결, 블로킹 위치, 서브 압박까지 다 묶여 있다. 그래도 이런 숫자는 경기의 체감을 꽤 정확하게 보여준다.
케이타는 여전히 흐름을 찢는 선수였다
케이타의 무서움은 단순히 많이 득점하는 데 있지 않다. 흐름이 바뀌려는 순간에 점수를 낸다. 3세트 현대캐피탈이 15-11로 앞섰을 때, 케이타는 연속 서브 득점으로 간격을 줄였다. 이 장면이 꽤 중요했다. 배구에서 4점 차 리드는 생각보다 크다. 그런데 강서브 한두 개가 리시브 라인을 흔들면 그 리드는 금방 손에서 미끄러진다.
볼리볼월드 대회 기록 기준으로 케이타는 이 대회 3경기에서 90점을 올렸다. 경기당 평균 30점이다. 공격 득점 76점, 서브 득점 10점까지 찍었고, 득점과 공격 부문 모두 최상단에 이름을 올렸다. 결승에서는 풀라드 시르잔을 상대로 38점을 몰아쳤고, 결국 대회 MVP까지 받았다. 현대캐피탈전 24점은 폭발의 중간 지점이었다는 얘기다.
시몬의 13점은 숫자보다 무거웠다
시몬은 나이만 보면 전성기와 거리가 있어 보여도, 경기 안에서 존재감은 여전히 선명했다. 현대캐피탈전 13점 중 블로킹이 4개였다. 미들블로커가 3세트 경기에서 블로킹 4개를 찍으면 상대 공격수는 선택지를 잃는다. 때릴 코스가 줄어들고, 세터는 한 박자 더 고민하게 된다. 그 짧은 망설임이 공격 리듬을 망친다.
더 재밌는 건 시몬이 공격 성공률에서도 날카로웠다는 점이다. 현대캐피탈전 공격 득점 7점, 공격 성공률 87.50%로 기록됐다. 공이 많이 가지 않아도 들어가면 거의 점수가 되는 타입. 이런 선수는 세트 후반에 더 무섭다. 케이타가 높은 볼을 해결하고, 시몬이 중앙에서 블로킹과 속공으로 압박하면 상대 블로커는 계속 늦어진다.
현대캐피탈에게 이 재회가 남긴 것
현대캐피탈 입장에서는 아쉬운 경기였다. 8강에서 알 라얀을 3-1로 잡을 때만 해도 허수봉 16점, 장추안 15점, 홍동선 14점으로 공격 분산이 꽤 좋았다. 하지만 자카르타전에서는 상대의 서브와 중앙 압박에 리듬이 흔들렸다. 2세트 세트 포인트를 살리지 못한 장면, 3세트 초반 리드를 지키지 못한 장면은 기록지보다 더 오래 남는다.
그래도 이 경기는 현대캐피탈만의 실패담으로 남기엔 아깝다. 케이타와 시몬은 V리그가 한때 품었던 세계급 재능이었고, 그들이 다시 한국 팀 앞에서 자기 클래스를 증명했다. 케이타는 더 넓어진 공격 범위와 서브로, 시몬은 여전히 무거운 중앙 존재감으로 경기를 가져갔다. 팬 입장에서는 씁쓸하면서도 반가운 장면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던 선수들이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큰 무대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재회는 꽤 오래 회자될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