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KIA 경기를 보다가 박재현 타석에서 리모컨을 내려놨다. 그냥 어린 선수가 잘 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타구 속도, 주루 판단, 외야 수비 범위, 그리고 경기 흐름을 바꾸는 한 방까지 한 화면 안에 같이 들어왔다. 팬들이 ‘박재현 5툴 외야수 탄생’을 말하는 이유가 숫자만 봐도 꽤 선명해졌다.
0.081에서 0.293, 이 도약은 꽤 과격하다
KBO 기록실 기준으로 박재현의 2025시즌은 58경기 타율 0.081, 홈런 0개였다. 62타수 5안타. 솔직히 이 숫자만 놓고 보면 1군 생존 자체가 숙제처럼 보였다. 그런데 2026시즌에는 120경기에서 타율 0.293, 137안타, 17홈런, 66타점, 74득점, 19도루까지 찍었다. OPS도 0.808이다. 단순한 반등이라기보다 선수 유형 자체가 바뀐 시즌에 가깝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건 장타 변화다. 지난해 장타율은 0.097이었는데 올해는 0.475까지 올라왔다. 안타를 많이 치는 것과 장타를 섞어 치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외야수 유망주가 2년 차에 20홈런 언저리 페이스를 만들었다는 건, 상대 배터리가 더 이상 ‘맞혀 잡으면 된다’고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5툴이라는 말이 붙으려면 숫자가 따라와야 한다
야구에서 5툴은 타격 정확도, 파워, 주루, 수비, 송구를 묶어 보는 말이다. 말은 멋있지만 아무에게나 붙이면 금방 가벼워진다. 박재현에게 이 표현이 붙기 시작한 건 적어도 세 가지 수치가 동시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타율 0.293으로 콘택트를 보여줬고, 17홈런으로 파워를 증명했으며, 19도루로 발까지 살렸다.
- 콘택트: 467타수 137안타, 타율 0.293
- 파워: 22루타 22개, 3루타 6개, 홈런 17개
- 주루: 도루 19개, 도루 실패 3개
- 득점 생산: 74득점, 66타점
- 활용도: 좌익수와 우익수를 오가며 외야 로테이션에 기여
근데 여기서 더 재밌는 건 박재현이 전형적인 거포 외야수처럼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3루타 6개는 발과 타구 판단이 같이 있어야 나오는 숫자다. 좌중간, 우중간으로 빠지는 타구를 단타에서 멈추지 않고 추가 진루로 바꿔놓는 선수는 타순 전체의 압박감을 바꾼다.
9월 11일 SSG전, 기록이 장면으로 바뀐 경기
기록은 누적이고, 팬 기억은 장면으로 남는다. 9월 11일 광주 SSG전이 딱 그랬다. KIA는 0-2로 끌려가던 흐름에서 따라붙었고, 5회 박재현이 우월 솔로포를 날렸다. 시즌 17호 홈런. 그 한 방으로 KIA는 5-2 승리를 가져갔고 3연패에서도 벗어났다.
이 장면이 중요한 건 박재현이 김도영 대신 3번 타자로 나섰다는 맥락 때문이다. 1번 타자형 자원으로만 보던 선수가 중심 타순에서 역전포를 친다. 이건 벤치의 선택지를 넓힌다. 빠른 발을 앞에 세울 수도 있고, 장타를 기대해 3번에 둘 수도 있다. 젊은 외야수가 팀 타선의 문법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슬럼프를 지나온 방식도 꽤 좋았다
사실 2026시즌 내내 올라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스포츠동아 보도에 따르면 박재현은 3~5월 타율 0.309, 8홈런, OPS 0.839로 뜨거웠지만 6월에는 홈런 없이 타율 0.222, OPS 0.538까지 내려앉았다. 어린 타자가 이 구간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꽤 많다. 상대 분석은 촘촘해지고, 본인은 매 타석에서 답을 찾으려다 스윙이 더 복잡해진다.
박재현이 흥미로운 건 이후의 대응이다. 겨울 동안 몸을 키우고, 손만 쓰던 타격에서 몸통 회전을 활용하는 쪽으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여기에 루틴을 다시 세우면서 7월에는 월간 타율 0.286, 5홈런, OPS 0.852로 반등했다. 단기 폭발보다 더 좋은 신호는 조정 능력이다. 리그가 박재현을 분석했을 때, 박재현도 다시 리그를 읽기 시작했다.
아직 남은 숙제까지 보여서 더 기대된다
좋은 시즌이지만 빈틈이 없는 건 아니다. 2026시즌 박재현은 볼넷 28개, 삼진 97개를 기록했다. 출루율 0.333은 타율에 비하면 살짝 아쉽다. 특히 리드오프와 중심 타순을 오갈 수 있는 선수라면 자기 존을 더 단단하게 가져가는 일이 다음 단계다. 나쁜 공에 손이 덜 나가면 장타 기회도 더 좋은 카운트에서 온다.
수비에서도 좌익수와 우익수를 오간 경험은 자산이지만, 장기적으로 어느 포지션에서 가장 큰 가치를 만들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발과 타구 판단이 계속 성장한다면 중견수 가능성까지 이야기될 수 있고, 코너 외야에 고정된다면 장타 생산량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 5툴 외야수라는 말은 완성 도장이 아니라 성장 방향에 가까운 표현이다.
그래도 2006년생 외야수가 2년 차에 타율 0.293, 17홈런, 19도루를 동시에 만들었다는 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작년의 0.081이 실패의 낙인이 아니라 준비 기간이었다면, 올해의 박재현은 꽤 매력적인 예고편을 보여준 셈이다. KIA 외야에 새 얼굴이 생겼다는 말보다, KIA 타선의 미래 계산식이 달라졌다는 쪽이 더 정확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