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를 끝까지 곱씹어봤더니, 기다림이 제일 시끄러웠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끝까지 곱씹어봤더니, 기다림이 제일 시끄러웠다

얼마 전 밤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읽고 관련 무대 영상 조각들까지 찾아보는데, 이상하게 장면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데 머릿속은 계속 바쁘더라고요. 누가 오지도 않고, 큰 사건이 터지는 것도 아닌데, 보고 나면 자꾸 “나는 뭘 기다리고 있지?” 쪽으로 생각이 끌려갑니다.

드라마처럼 다음 회차가 궁금해서 달리는 작품은 아니지만, 정주행 리뷰어 입장에서는 오히려 더 묘했습니다. 1막과 2막이 닮아 있고, 인물들은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시간은 간 것 같은데 제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지루함이 단순히 재미없어서 생기는 지루함이 아니라, 일부러 관객을 그 자리에 붙잡아두는 장치처럼 느껴졌어요.

줄거리는 단순한데 마음은 복잡해진다

이 작품의 기본 상황은 아주 간단합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사람이 어느 길가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립니다. 둘은 떠날까 말까 망설이고, 배고프다거나 신발이 아프다거나 하는 사소한 말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다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고, 다시 기다림은 이어집니다.

스포를 조심해서 말하면, 이 작품은 “드디어 누가 왔다!” 같은 통쾌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 자체를 오래 보여줍니다. 보통 드라마라면 떡밥을 던지고 회수하면서 시청자를 끌고 가는데, 고도를 기다리며는 떡밥을 회수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취향에 따라 “이게 뭐야?”가 먼저 나올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비어 있는 느낌 때문에 오래 남을 수도 있어요.

관전 포인트는 사건보다 리듬

이 작품을 볼 때는 큰 사건보다 대사의 리듬을 따라가는 쪽이 훨씬 재밌습니다. 두 인물의 대화는 만담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철학적인 쪽으로 미끄러집니다. 농담 같았던 말이 몇 초 뒤엔 꽤 서늘하게 다가오고, 별것 아닌 침묵이 이상하게 크게 들립니다.

  •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티격태격이 현실적인 친구 관계처럼 보이는 순간
  •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불편해지는 지점
  • 같은 말과 행동이 반복될 때 생기는 묘한 피로감
  • ‘고도’가 누구인지보다 왜 기다림을 멈추지 못하는지가 더 궁금해지는 흐름

개인적으로는 럭키의 장면이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말이 많아지는데 의미는 점점 흩어지고, 그 혼란스러움이 그냥 난해한 장난처럼만 보이지는 않거든요. 예능으로 치면 웃긴데 웃고 나서 살짝 찝찝한 장면, 드라마로 치면 설명은 없지만 감정은 정확히 꽂히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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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는 확실히 갈린다

솔직히 말하면,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분에게는 꽤 힘든 작품일 수 있습니다. 여기엔 복수극의 속도감도 없고, 로맨스의 설렘도 없고, 범인을 쫓는 긴장감도 없습니다. 같은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을 오래 봐야 하고, 뭔가 풀릴 듯하다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느낌을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평소에 뭔가를 기다리면서도 그 기다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진 않잖아요. 연락, 합격, 변화, 인정, 기회 같은 것들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그 기다리는 시간을 확대해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보는 동안엔 답답한데, 보고 나면 내 일상 쪽으로 슬쩍 넘어옵니다.

이런 분에게 잘 맞을 가능성이 큽니다

  • 사건보다 대사와 분위기를 오래 곱씹는 걸 좋아하는 사람
  • 열린 해석을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
  • 무대극 특유의 반복과 침묵을 즐길 수 있는 사람
  • 보고 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는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

이런 분에겐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명확한 해답과 깔끔한 사건 진행을 기대하는 사람
  • 초반 10분 안에 강한 몰입 포인트가 있어야 하는 사람
  • 상징적인 대사보다 현실적인 서사를 선호하는 사람

왜 아직도 계속 이야기되는 작품일까

1950년대에 나온 작품인데도 고도를 기다리며가 낡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기다림이라는 감정이 너무 현재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시대가 달라져도 사람은 계속 기다립니다. 답장을 기다리고, 발표를 기다리고, 인생이 좀 나아질 타이밍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뭘 원하는지도 흐려질 때가 있죠.

이 작품은 그 흐릿함을 선명하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대신 두 사람을 무대 위에 세워두고, 관객이 자기 방식으로 불편해지게 만듭니다. 저는 그 불편함이 꽤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친절하진 않지만, 이상하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작품이라고 할까요.

추천 점수로 따지면 대중적인 몰입감은 5점 만점에 2.5점, 여운과 해석의 재미는 4.5점 정도 주고 싶습니다. 재미의 방향이 완전히 다릅니다. “와, 다음 장면!” 하고 달리는 맛은 약하지만, 보고 난 뒤 며칠 동안 문득문득 떠오르는 힘이 있어요.

저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볼 때마다 결국 고도보다 기다리는 사람들 쪽에 마음이 갑니다. 오지 않는 누군가보다, 못 떠나고 버티는 두 사람이 더 현실적이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은 난해한 고전이라기보다, 생각보다 우리랑 가까운 자리에서 계속 중얼거리는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끝까지 곱씹어봤더니, 기다림이 제일 시끄러웠다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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