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설악산 단풍을 보러 갔는데, 이상하게도 제일 오래 기억에 남은 건 케이블카 줄도 아니고 유명한 전망대도 아니었습니다. 아침 기온이 9도쯤으로 떨어진 날, 오색 쪽 골목에서 김이 올라오는 약수터 물소리와 젖은 낙엽 냄새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설악산 단풍은 워낙 이름이 커서 늘 북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길을 조금만 비켜 잡으면 의외로 조용한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 많은 설악 대신 오색에서 시작한 이유
설악산 단풍철에 소공원 쪽으로 바로 들어가면 편하긴 합니다. 버스도 많고 식당도 몰려 있고, 울산바위나 권금성처럼 이름난 곳도 가깝습니다. 그런데 단풍 절정 무렵에는 오전 8시만 지나도 주차장부터 숨이 찹니다. 저는 그 복작임이 조금 버거워서 이번에는 오색약수터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오색은 관광지이면서도 동네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큰 간판 사이로 오래된 민박집이 있고,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식당 앞에는 파를 다듬는 손길이 보입니다. 단풍은 산 위에서만 예쁜 게 아니라 이런 낮은 골목 옆에서도 천천히 들어옵니다. 빨갛게 터진 단풍잎보다, 아직 노란빛과 초록빛이 섞여 있는 나무들이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오색약수터 주변은 짧게 걸어도 계절이 보입니다
오색약수터 주변 산책로는 오래 걷지 않아도 가을 기분을 잡기 좋습니다. 왕복 40분에서 1시간 정도만 천천히 걸어도 계곡 소리, 젖은 돌, 낮은 단풍을 가까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일부러 큰 카메라를 들고 온 사람들 뒤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약수터를 지나 조금 한산한 길목에서 멈췄고, 거기서 10분 넘게 물소리만 들었습니다.
사실 설악산 단풍은 멀리서 한 번에 보는 풍경도 좋지만, 가까이 보면 더 생활감이 있습니다. 낙엽이 신발 밑에서 바스러지는 소리, 등산복을 입은 어르신들이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따라 마시는 모습, 작은 식당 창문에 비친 노란 나무 같은 것들이요. 유명한 포인트를 찍고 돌아오는 여행보다 이런 장면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한계령은 지나치는 길이 아니라 머무는 길이었습니다
오색에서 조금 더 움직이면 한계령 쪽으로 갈 수 있습니다. 차로 오르는 길은 굽이가 많아서 운전자는 조금 피곤할 수 있지만, 단풍철에는 그 굽이마다 색이 다르게 보입니다. 아래쪽은 아직 초록이 섞여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붉은빛과 갈색이 짙어집니다. 고도가 바뀌면 계절도 몇 걸음씩 앞당겨지는 느낌이 듭니다.
한계령휴게소는 사람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래도 오래 머무는 여행객보다 잠깐 쉬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서, 시간만 잘 잡으면 의외로 조용합니다. 저는 점심 직전보다 이른 오전을 좋아합니다. 바람이 차갑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서 있으면 말수가 줄어듭니다. 풍경이 너무 커서 굳이 설명을 붙이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습니다.
- 오색약수터 주변은 짧은 산책에 좋고, 단풍을 가까이 보기 편합니다.
- 한계령은 이동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고도별 단풍 차이가 뚜렷합니다.
- 소공원 쪽보다 식사와 주차 선택지는 적지만 분위기는 훨씬 차분합니다.
붐비는 시간을 피하려면 하루를 조금 당기면 됩니다
단풍철 설악산은 시간 차이가 꽤 큽니다. 제가 갔던 날도 오전 7시대에는 오색 쪽 길이 한산했는데, 10시를 넘기자 식당 앞과 길가 주차 공간이 눈에 띄게 찼습니다. 유명 산의 단풍 여행은 장소보다 시간이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같은 길도 아침에는 동네 산책길 같고, 낮에는 관광지 입구처럼 바뀝니다.
가능하면 평일, 어렵다면 주말 이른 오전이 낫습니다. 그리고 코스를 너무 많이 넣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오색약수터, 한계령, 낙산이나 속초 시내까지 하루에 전부 넣으면 이동만 하다가 계절을 놓치기 쉽습니다. 저는 오색에서 걷고, 한계령에서 바람을 맞고, 늦은 오후에는 숙소 근처 골목을 조금 도는 정도가 가장 편했습니다.
작게 챙기면 좋은 것들
- 얇은 장갑: 아침 계곡 근처는 손이 먼저 차가워집니다.
- 미끄럼 덜한 신발: 낙엽 아래 젖은 돌이 숨어 있습니다.
- 작은 간식: 조용한 길에서는 문 연 가게가 생각보다 적습니다.
- 여유 시간 1시간: 차가 막히지 않아도 멈추고 싶은 순간이 생깁니다.
설악산 단풍은 유명하지만, 조용히 볼 방법도 있습니다
설악산 단풍이라고 하면 대단한 풍경을 먼저 떠올리지만, 제게는 오히려 작은 장면들이 더 선명했습니다. 약수터 옆에서 물통을 채우던 사람, 바람에 뒤집힌 단풍잎의 연한 뒷면, 휴게소 난간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산을 보던 시간 같은 것들입니다. 사람이 적은 여행을 좋아한다면 설악산을 피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남들이 몰리는 정면으로 들어가기보다, 옆문처럼 느껴지는 길을 고르면 됩니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저는 또 오색에서 시작할 것 같습니다. 단풍 절정이라는 말에 너무 마음이 급해지지 않는 곳이라서요. 붉은 산을 크게 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동네 골목 끝에 내려앉은 가을을 천천히 보는 쪽이 더 여행답게 느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