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골암(충북)
탈골암(충북)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569-72
* 비구니 선객들의 도량, 탈골암 *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비구니 선객들의 도량 탈골암(脫骨庵) 탈골암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 두 이야기가 전한다. 하나는 진표 스님이 이곳에서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의 제자들을 깨우쳐 생사윤회를 벗어나 해탈케 했다하여 불렀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 탈해왕 때 경주 김씨의 시조인 알지가 닭의 머리를 한 자신의 용모를 한탄하던 중 속리산의 한 암자에 좋은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물을 마시고 사람의 머리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암자를 탈골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이름을 두고 사람들은 달리 이야기를 하며 사찰의 내력을 가름하여 왔다. 그 시대를 살지 않았으니 누구의 말이 옳고 그런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탈골암을 보면 진표스님의 이야기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한자리를 오래도록 지키고 있는 청산과도 같은 대중과 흰 구름처럼 떠다니는 납자들이 어우러져 윤회의 틀을 깨고자 정진하는 곳이 바로 지금의 탈골암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탈골암의 중심은 월산(月山) 스님께서 이름을 붙여주셨다고 하는 대휴선원이다. “대휴(大休)”란 크게 쉰다는 말로, 선방에 들어서는 수행자 모두가 안으로는 헐떡이는 마음을 쉬고 밖으로는 구하는 마음을 쉬어 일체 번뇌의 뼈를 벗어 버리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조용한 듯 내비치는 탈골암의 하루 일상은 이처럼 크게 쉬고자 하는 치열한 자신과의 싸움이 소리 없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일상은 올 해 떨어지는 낙엽이 쌓여 다음 해의 밑거름이 되 듯 영원토록 이어지는 탈골암의 전통이 되어가고 있다. 또한, 비가 많이 내린 여름이면 약사전 앞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연못에서 떨어지는 작은 폭포가 인상적이다.
* 탈골암의 창건배경 및 역사 *
탈골암은 법주사의 산내암자로 720년(신라 성덕왕 19) 창건되었고, 776년(혜공왕 12)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했다고 한다. 암자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진표 스님이 이곳에서 영심(永深)·융종(融宗)·불타(佛陀) 등의 제자들을 깨우쳐 생사윤회를 벗어나 해탈케 했다하여 탈골암으로 불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연혁은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 이르도록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다만 1624년(인조 2) 벽암각성(碧巖覺性) 스님이 중창했다고만 알려질 뿐이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50년 한국전쟁 때 건물이 전부 불타 없어지고 폐허가 되고 말았다. 이후 1954년 일부 중건을 하였으나 작은 암자에 약사여래좌상만 봉안되었을 뿐 아무도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 1967년 영수(榮修) 스님이 머물면서 법등을 잇기 시작했다. 영수 스님은 1975년부터 중창불사에 들어가 1977년에 삼성전을 짓고, 1987년에는 상좌인 혜운(慧芸) 스님과 함께 선원을 건립하기 시작해 1990년에 완공을 보았다. 이 선원은 당시 조실이었던 월산(月山) 스님이 “대휴선원(大休禪院)”이라 이름을 지어주어 눈푸른 납자들의 정진처가 되게 하였다. 1993년 2월에는 화재로 17평의 법당이 소실되자 그 해 12월부터 법당 중건불사에 들어갔으며, 1995년 가을에 약사전과 요사인 운하당·연화당의 완공으로 오늘날 탈골암의 모습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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