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수항리사지
평창 수항리사지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수항절터길 147
오랫동안 ‘수항리절터’로만 알려져 오다, 1983년 ‘태백곡수다사(太伯谷水多事)’ 등의 명순기와 등이 출토되어, 이곳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수다사지(水多寺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헌상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가 완성된 조선 단종 2년(1432년)까지 나타나다가 “동국여지승람”부터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약 15세기까지는 존속했던 사찰로 추정된다.
유적(遺蹟)으로는 부재(部材) 일부가 결손되어 원형을 찾아볼 수 없는 석탑 1기와 건물지(建物址)의 주초석(柱礎石)이 남아 있다. “조선보물조사 연구”에 의하면 이곳에 삼층석탑 1기(基), 석불입상(石佛立像) 2구(軀), 석불좌상(石佛坐像) 1구, 당간지주(幢竿支柱) 1기와 탑의 석조물이 있었으나 6.25 때 유실(流失)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석탑 1기도 동란 중 도괴(倒壞)된 것을 부락에서 탑재(塔材)를 수습(收拾)하여 그 일부를 복원(復元)하였다고 하는데 강릉 신복사지(神福寺址) 삼층석탑과 같은 가구수법(架構手法)을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자장 이후 월정사에 주석한 스님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신효거사(信孝居士), 범일(梵日 810~ 889) 문인 신의(信義) 및 수다사 장로 유연(有緣)을 들고 있다.
따라서 신의보다 후세대이거나 적어도 동시대인 9세기 후반내지 10세기 초까지의 수다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에 의하면 지광국사 해린(智光國師 海麟)이 11세기 초에 동사(同寺)에서 10년간 주지하였다고 전한다.
이곳에서는 1987년 12월 대형 고려시대 금고(金鼓) 1점과 촛대부속구 1점이 발견되었으며, 촛대부속구에 외반된 구연부 뒷면에 대정28년(大定二十八年)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어 적어도 고려 명종18년(1188)에는 이 사찰의 법등이 이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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