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재
금호재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대동길 33
조선 중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 선생의 재사(齋舍)로 용흥사의 부속건물이다. 2차례에 걸쳐 옮겼는데 1966년에 현 장소로 이전했다. 용흥사가 1695년까지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적어도 17세기 후반의 건물로 여겨진다. 금호재의 형태는 팔작지붕의 집으로 목재는 느티나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연꽃 무늬의 공포(供包)와 망새(望瓦)에는 “병오년 9월 11일”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어 제작 연대를 추정케 한다. 금호재에서 북동쪽으로 1㎞ 정도 떨어진 야산 기슭에는 그의 묘소와 함께 창녕 대동리 금헌묘석상(昌寧大同里琴軒墓石像:경남유형문화재)이 있다.
* 조선 전기의 학자, 이장곤에 대하여 *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김굉필의 문인. 학문,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495년(연산군 1)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校理)로 있으면서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거제로 귀양갔으나, 함흥으로 도주하여 양수척(楊水尺)의 무리에 섞여 살면서 목숨을 유지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관직에 다시 임명되어 교리 ·장령(掌令)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5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듬해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1519년 병조판서 재임시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이 주도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趙光祖) 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삭직되었다. 문집에는 《금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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