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 휘 유경 효자문·김공 휘 홍익 충신문
김공 휘 유경 효자문·김공 휘 홍익 충신문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 김공 휘 유경 효자문
이 효자문은 김공 휘 유경(단기 4002~4081년/서기 1669~1748년)께서 10세때 친상을 당하여 예법대로 복을 입지 못한 것을 애통하신 나머지 공의 춘추 17세(단기 4073년/서기1740년)에 추복을 하고 조석으로 곡하며 여묘3년간 슬픔을 다하신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문이다. 영조께서 들으시고 가상한 마음이라 하며 식물까지 내리시고는 경은 사양치 말라 하셨다. 그리고 공께서는 평생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시며 충언으로 일관하시니 이로 인하여 일신상의 영달보다는 언제나 환해의 풍파가 거세였다. 공은 충신문 김묵재공의 종증손이며 자는 덕유요 호는 용곡이시다. 현종 10년 기유 2월 4일생으로 영조24년 (단기 4081년/서기 1748년) 무진 7월 8일에 졸하시니 향수 80이셨고, 용곡집이 가장으로 전한다. 후에 효정이라 증시하고 영조 27년 (단기 4084년/서기 1751년) 신미에 나라에서 정려를 명하다.
* 김공 휘 홍익 충신문
이 충신문은 김공 휘 홍익(단기 3914~3969년/서기 1581~1636년)께서 병자호란때 연산 현감으로 재직중 근왕병을 이끌고 수원 험전땅에서 중과부적의 적병과 일척단검으로 항전하시다가 단기 3969년(서기1636년) 12월 27일에 춘추 56세로 장렬히 순국하신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정문이다. 또한 충곡서원에 사육신과 함께 위패가 봉안되어 춘추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리고 묵재공 실기 1권이 전한다. 공의 본관은 경주요, 자는 익지며 호는 묵재니 선조 14년 신사 2월 12일생이시다. 영조 17년(단기 4074년/서기 1741년) 신유에 나라에서 정려의명이 내려지고 정조 18년(단기 4102년/서기 1769년) 갑인에는 충민이라 증시되어 현판을 개건하다.
https://www.seosan.go.kr/tour/index.do
위치
모두 검색의 사전 서면 동의 없이 사이트의 일체의 정보, 콘텐츠 및 UI 등을 상업적 목적으로 전재, 전송, 스크래핑, 파싱 등 무단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모두 페이지의 모든 컨텐츠는 모두 검색 또는 페이지 소유주, 링크 소유자에게 있으며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