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대성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26
* 가야의 성립과 전개를 해명하는 가장 좋은 유적, 대성동고분군 *
대성동유적은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구지봉(龜旨峰)과 김해패총(金海貝塚)으로 유명한 회현리 패총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인접하여 김수로왕릉이 있다. 즉, 공설운동장의 바로 북쪽 뒤편에 표고 22.6m의 '왜(애)꼬지'라 불리는 구릉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 유적은 경성대학교박물관에서 1990년부터 1992년까지 3차에 걸쳐서 발굴 조사를 한 결과 금관가야 지배자집단의 공동묘역으로 판명되었다. 입지조건이 좋은 구릉의 능선부에는 왕 묘와 이에 상응하는 지배자의 무덤이, 경사면에는 보다 신분이 낮은 자들의 무덤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유적의 발굴은 경성대학박물관이 1990년 6~7월, 1990년 9월~1991년 4월 등 2차에 걸쳐 발굴조사하였다. 1차에서는 4세기 말~5세기 초 본가야(금관가야)의 왕급 무덤 2기(基)를, 2차에서는 3세기 후반~5세기 전반에 이르는 다수의 왕후묘(王侯墓)가 포함된 37기의 각종 분묘를 발굴조사하여, 한국 고대사에서 공백으로 남은 4세기 전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얻게 되었다.
* 대성동고분군의 역사적 의의 *
조사된 무덤은 총 136기로서 종류는 목관묘(木棺墓), 목곽묘(木槨墓), 옹관묘(甕棺墓), 석곽묘 (石槨墓),횡혈·횡구식석실묘(橫穴·橫口式石室墓)이다. 이 가운데 목곽묘가 묘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구릉의 능선부에 형성된 대형의 목곽묘들은 매장주체부의 크기와 부장유물의 질과 양에서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걸쳐서 형성된 금관가야 지배자들의 무덤이며 특히 이 유적의 대형 목곽묘(木槨墓) 조사를 통해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3세기 말을 기점으로 하여 처음으로 사람과 말(馬)을 순장(殉葬)하고,무기를 구부려 부장하는 습속과 함께 기마용(騎馬用)의 철제갑주(鐵製甲胄), 북방 유목민족적 묘제, 마구류(馬具類), 도질토기(陶質土器), 오르도스형 동복(銅復)등 북방유목민족의 습속과 유물이 다량으로 반영되거나 출토되고 있는 사실이다. 둘째, 통형동기(筒形銅器), 파형동기(巴形銅器), 각종 벽옥제(碧玉製)의 석제품(石製品) 등 고대 일본과의 교섭실태를 구명할 수 있는 자료의 출토 등이다. 이와 같이 대성동유적은 가야의 성립과 전개, 성격, 정치·사회구조를 해명하는데 으뜸가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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