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홍릉(고종과 명성황후)과 유릉(순종과 순명,순정 황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남양주 홍릉(고종과 명성황후)과 유릉(순종과 순명,순정 황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조선왕조 마지막 두 황제와 그 비를 모신 이곳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홍릉은 대한제국 초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의 능이고, 유릉은 마지막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황후 민씨 및 계비 순정황후 윤 씨를 모신 능이다. 원래 홍릉은 명성황후 민씨의 능으로서 서울 청량리에 있었으나 고종의 승하로 국장할 때 이곳에 옮기어 함께 모셨다. 유릉은 원래 순명황후 민씨의 능으로 양주 용마산에 있었으나 순종 인산 때 이곳에 이장하였고, 1966년 순정황후 윤 씨를 또한 이곳에 함께 모셨다. 홍릉과 유릉은 종래의 왕릉과 형식이 다르며 모두 광무 이후 황제라 칭하던 왕이었던 만큼 명태 조의 효릉을 본떠서 조영하였다. 종래의 정자각 대신 정면 5칸, 측면 4칸의 침전을 세웠고 그 앞쪽으로 문무석을 세우고,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순으로 석수를 세워 놓고 있다. 홍릉 석물이 전통적인 수법으로 만들어진 데 대하여 유릉 석물은 사실적이고 개성적이며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다. 청량리에서 경춘 가도를 가다 도농동 삼거리 검문소에서 춘천 쪽으로 약 4km 지점 오른 편에 울 창한 소나무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왕·공족의 분영은 묘로 한다는 정책을 펼쳤다. 왕의 무덤인 능陵도 세자의 무덤인 원園도 아닌 일반인의 무덤인 묘墓로 격하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왕공가궤범을 따르자면 고종과 순종의 무덤은 왕릉이 될 수 없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생각해낸 것이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의 유릉이었다. 고종의 장례 때는 명성황후의 재궁을 원 홍릉(청량리)에서 현 홍릉(남양주시)으로 옮겨와 합장하였고, 순종의 장례 때에도 구 유릉(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순명효황후의 재궁을 모셔와 합봉(남양주시) 하였다. 새로운 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능의 칭호를 가져다 쓰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이것을 막을 법적인 근거가 없었으며, 능의 이장 문제 또한 이왕 직이나 총독부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왕실 내의 문제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문제는 별 탈 없이 처리되었다. 그러나 본래 왕릉 장법에서는 왕비의 능에 왕을 합장할 경우엔 새로운 능호를 쓰게 되어 있다. 중종이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옆에 같이(이때의 경우 한 구역 안 두 개의 능침이라 하여 동원 이강이라 한다. 봉분은 따로 떨어져 두 개이지만 제사는 한 정자각에서 받는다) 안장되었을 때 희릉의 능호를 같이 쓸 수 없다 해서 정릉으로 능호를 새로 올렸던 전례가 있고, 숙종은 인현왕후의 능에 묻을 것을 미리 지시했기 때문에 인현왕후의 능호인 명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이 경우는 봉분이 붙어있어서 쌍릉이라고 한다). 원래 왕릉 장법에 따르면 새로운 능호를 써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고종과 순종의 경우는 일제의 간섭으로 인하여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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