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사
망해사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10길 94
김제에서 서북방 약27km 지점에 있으며 심포 어항에 이르기 1km 전방에서 오른쪽 언덕바지 진봉산 능선따라 올라가 고개 너머 왼쪽으로 즉 큰길에서 약500m지점 정도를 내려가면 깎은듯이 세워진 기암괴석 벼랑위에 망망대해 서해의 파도가 출렁이고 고군산열도가 내다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어 이름 그대로 망해사이다. 전하는 바로는 이곳은 본시 섬이었다 하여 642년(백제 의자왕 2년)에 부설거사가 까닭이 있어 이곳에 사찰을 개창하여 수도하다가 입적하신 곳이라 하며 그 후 754년(경덕왕 13년)에 당나라의 중 중도법사(일명 통장화상)가 중창하였으나 조선조에 들어 많은 수난을 당하였다. 그 뒤 인조대왕 때 만경 불거촌출신인 고명한 화상인 진묵대사가 재건복구하여 크게 번창하였는데 그 때가 망해사로서는 최강전성기였으며, 그 후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망해사 경내에는 보광명전 낙서전 칠성각 요사 그리고 4개의 부도가 있다 *낙서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8호 (지정연도 : 1986년 9월 8일) 망해사 편액은 낙서전에 걸쳐있어 그 역사의 일부를 엿볼 수 있으며, 낙서전은 비록 규모가 작으나 이익공집으로 초가지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구식 한와로 지붕을 덮고 있다. 이 낙서전은 1589년(조선 선조 22년)에 진묵대사가 처음으로 세웠고 그 후 1933년과 1977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불로 아미타불좌상(불신고58cm, 슬폭48cm, 좌대고18cm, 폭57cm) 우측 부처상으로는 관세음보살상(불신고58cm, 슬폭33cm, 좌고13cm, 폭40cm)을 모셔놓고 있는데 규모는 작지만 연화좌대위에 안치된 좌상으로서 조각의 수법이 기묘하다. 건물의 외형은 팔작지붕의 ㄱ자형으로써 앞으로 한 칸 나온 부분에는 마루가 놓여있고 그 위에 근래에 만든 종이 걸려있다. 또한 건물의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서 원래 이 낙서전은 법당 겸 요사로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하고 있다. 낙서전 맞은 쪽에는 노거수가 2그루 있어 망해사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봉수대 서해에 접하고 있는 봉화산 꼭대기에 봉화대가 설치되어 있다. 진봉반도 서남쪽 육지의 맨 끝부분에 있는 해발 50 - 60m 높이의 산인데 산아래 (서남쪽)는 황해이고 서북쪽은 만경강 입구, 동남쪽은 동진강 입구이다. 따라서 오직 동북쪽으로 만경강 연안에 봉화산 높이와 비슷한 산들이 줄지어 서 있을 뿐이고 동쪽으로는 진봉평야가 하나로 이어져 호남평야를 이루고 있다. 봉수대의 상단좌대는 가로 6m, 세로 10m의 직사각형이며 서북쪽과 동북쪽은 능선이 있고, 좌우는 절벽이다. 그리고 산꼭대기의 넓이가 100평 정도인데 세계단으로 단위 모형을 나타내어 특징이 있다. 확실한 축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나라 봉수대를 설치한 것이 고려시대라고 할 때, 이 곳 봉수대의 축조도 고려시대로 보아야 될 것 같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방법으로 낮에는 연기를 피우고 밤에는 횃불을 올려 신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방법을 사용한 것은 아주 오랜 옛날이었으나 법을 만들어 이 제도를 실시한 것은 고려 의종 3년(1149년) 서북면 병마사 조진약이 임금께 아뢰어 실시하였으며, 조선 세종 때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 하였다. 봉수제도에서는 평상시에 하나, 적이나타나면 둘, 적이 국경에 가까이 다가 오면 셋, 적이 국경을 넘으면 넷, 우리 군사와 적군이 싸우면 다섯 개의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한편 봉화산의 봉수대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반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말썽이 일어나자 이것을 계화도로 옮겼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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