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김씨삼강정문
서흥김씨삼강정문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고삼호수로 141-30
충신 김충수와 그의 아들 함의 효행 및 열녀 두분의 행적을 높이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것으로, 김충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죽산에서 왜군과 접전하다가 적에게 붙잡히자 같이 싸우던 아들함이 부친을 구하고자 적진에 쳐들어가 적을 무찌르다가 부자가 동시에 순절하여 선조 39(1606)년 김함의 효절을 기려 효자 정문을 내렸고, 숙종 26년(1700)년 김충수의 충정을 기려 충신 정문을 내렸다. 한편 김함의 손녀인 온양 정씨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이천 거마산으로 피신했으나 적의 추적으로 욕을 면키 어렵게 되자 두 딸과 함께 못에 투신자살하여 정절을 지켰다. 영조 16(1740)년 열녀정문이 내려졌고, 청주 한씨는 영조 7(1731)년에 부군인 익성(益聖)이 위독하여 손가락을 잘라 수혈을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임종하니 자식 없는 것은 부도(婦道)를 다하지 못함이라하여 부군을 따라 순절하여 영조 13(1737)년 열녀정문이 내려졌다.
* 김충수(1549 ∼ 1592)
본관은 서흥(瑞興), 호는 창죽헌(倉竹軒)이며, 죽산부 양지현 월로동(月老洞: 현 고삼면 월향리)에서 출생했다. 6세에 서당에서 글을 깨우쳤으며 재주가 뛰어났다. 9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이후 모친 한씨가 종창을 앓았는데 반년이 넘도록 치료를 해도 효험이 없었다.그런데 의원이 입으로 고름을 핥아내는 것이 즉효라 하자 이를 시행해 효험을 보았다. 이후에도 모친의 봉양에 열과 성을 다해 효자로서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45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산속에 숨어 있던 사람들을 규합하여 의병진을 조직하고, 죽주성으로 달려가 왜적과 격전을 벌였다. 하지만 노도처럼 밀려드는 적들에 대항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이에 그의 아들 함(涵)은 적전을 뚫고 부자가 합세하였으나 10월 말경 최후를 맞이하였다.숙종 26(1700)년 증손 후가 정충(旌忠)의 장계를 올렸으나 조정의 홍혜는 하사되지 않았다. 이후 영조 16(1740)년 5대손 대영(大榮)과 7대손 동현(東賢)이 상계하여 삼강정려(三綱旌閭)를 하사받았고 봉정대부 사헌부장령직에 추증되었다.
* 규격 - 정면 4칸, 측면 1칸
* 연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서흥김씨 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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