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카드값을 확인하다가 살짝 멈칫했습니다. 분명 큰돈을 쓴 기억은 없는데, 월말 합계는 꽤 묵직하더라고요. 커피 몇 번, 배달 몇 번, 편의점 몇 번이 모이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계부 앱 대신 엑셀로 직접 지출표를 만들어봤습니다. 사실 엑셀은 회사에서만 쓰는 딱딱한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생활비를 들여다보는 용도로 쓰니 생각보다 훨씬 편했습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처음에는 항목을 아주 많이 나누려고 했습니다. 식비, 외식, 카페, 장보기, 교통, 구독, 병원, 생활용품, 경조사까지요. 그런데 막상 입력하려니 귀찮아서 이틀 만에 손이 안 갔습니다. 그래서 기준을 확 줄였습니다. 날짜, 사용처, 금액, 분류, 메모. 이 다섯 칸만 남겼습니다.
엑셀에서 생활 기록을 오래 쓰려면 예쁘게 꾸미는 것보다 입력이 쉬워야 했습니다. 저는 첫 행에 제목을 넣고, 아래로 지출을 한 줄씩 적었습니다. 예를 들면 9월 1일, 편의점, 4800원, 간식, 야근 전 초콜릿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쓰면 나중에 봐도 왜 썼는지 바로 떠오릅니다.
의외로 중요한 건 메모 칸이었습니다. 같은 12000원이라도 혼자 먹은 점심인지, 친구와 나눠 낸 커피값인지 느낌이 다르거든요. 숫자만 보면 괜히 죄책감이 생기는데, 메모가 있으면 소비 흐름이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합계 함수 하나만 알아도 돈 흐름이 보인다
제가 가장 먼저 쓴 기능은 SUM이었습니다. 금액 칸 전체를 더하는 기능입니다. 예를 들어 금액이 C열에 있다면 아래쪽 빈칸에 총합을 넣어두는 식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한 달에 얼마를 썼는지 바로 보입니다.
그런데 진짜 편했던 건 분류별 합계였습니다. 식비만 얼마인지, 카페만 얼마인지 보고 싶을 때는 SUMIF를 쓰면 됩니다. 처음엔 함수 이름부터 부담스러웠는데, 구조는 단순했습니다. 특정 분류에 해당하는 금액만 골라 더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2주 동안 입력해본 뒤에 카페 금액만 따로 봤습니다. 예상은 3만 원대였는데 실제로는 62000원이었습니다. 하루에 4000원짜리 커피를 가끔 마신다고 생각했는데, 주말 디저트까지 같이 잡히니 금액이 확 올라갔습니다. 이건 앱 알림으로 볼 때보다 더 세게 와닿았습니다. 제가 직접 입력한 숫자라 변명할 여지가 적었거든요.
필터를 켜면 엑셀이 갑자기 생활 도구가 된다
엑셀을 가계부로 쓸 때 제일 만족스러웠던 기능은 필터였습니다. 제목 행을 선택하고 필터를 켜면, 분류별로 필요한 항목만 볼 수 있습니다. 식비만 보기, 구독만 보기, 10000원 이상만 보기 같은 게 바로 됩니다.
저는 특히 구독 항목을 따로 봤을 때 놀랐습니다. 음악, 영상, 클라우드, 멤버십까지 합치니 한 달에 38900원이 나갔습니다. 하나하나는 작아 보이는데, 엑셀에서 한 줄로 모아놓으니 존재감이 생겼습니다. 그중 거의 안 쓰던 서비스 하나를 해지했더니 바로 월 9900원이 줄었습니다.
- 자주 쓰는 분류는 6개 안팎으로 시작하면 입력이 덜 귀찮다
- 금액은 카드 승인 문자 그대로 적으면 빠뜨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 필터로 구독 항목만 따로 보면 새는 돈을 찾기 쉽다
- 메모 칸에는 감정이나 상황을 짧게 적어두면 나중에 판단하기 좋다
근데 여기서 욕심을 내면 또 피곤해집니다. 저는 색깔도 넣고 그래프도 만들다가 어느 순간 관리 자체가 일이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단순한 표로 돌아왔습니다. 생활 기록은 오래 남는 쪽이 이깁니다.
색깔은 적게, 조건부 서식은 확실하게
엑셀 화면을 예쁘게 만들고 싶어서 처음에는 분류마다 색을 다르게 넣었습니다. 식비는 초록, 카페는 갈색, 교통은 파랑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색이 많아지니 오히려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딱 두 가지 조건만 색으로 표시합니다.
첫째, 30000원 이상 지출은 연한 빨간색으로 표시했습니다. 둘째, 구독 항목은 연한 노란색으로 표시했습니다. 이 두 가지만 해도 눈에 띄어야 할 지출이 충분히 보였습니다. 조건부 서식을 쓰면 금액이 기준보다 클 때 자동으로 색이 들어가서 따로 칠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평소 점심값은 9000원에서 12000원 정도인데, 어느 날 46000원이 찍혀 있으면 바로 보입니다. 그날 메모를 보면 친구 생일 밥값이었고, 그러면 납득이 됩니다. 반대로 이유 없이 큰 금액이 반복되면 그건 습관일 가능성이 큽니다.
앱보다 엑셀이 나았던 부분
가계부 앱은 자동 입력이 편합니다. 이건 엑셀이 못 이깁니다. 카드 문자나 계좌 연동이 되는 앱은 확실히 빠릅니다. 다만 저는 자동으로 들어온 기록을 잘 안 보게 됐습니다. 들어오긴 들어오는데, 제 머릿속에는 잘 안 남았습니다.
엑셀은 반대였습니다. 입력하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를 한 번 더 보게 됩니다. 편의점 4800원을 적으면서 어제도 비슷하게 썼다는 걸 떠올리고, 배달 22000원을 적으면서 이번 주에 이미 두 번 시켰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불편함이 오히려 장점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하나 좋은 점은 내 방식대로 바꿀 수 있다는 겁니다. 저는 절약률 같은 거창한 지표보다 이번 달 충동구매 횟수를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분류에 충동구매를 따로 만들고, 메모에 왜 샀는지 적었습니다. 피곤해서, 세일이라서, 무료배송 맞추려고. 이렇게 적다 보니 제 소비 패턴이 꽤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엑셀을 잘해야만 생활에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SUM, SUMIF, 필터, 조건부 서식 정도만 알아도 충분했습니다. 대단한 분석보다 중요한 건 내가 계속 열어볼 수 있는 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완벽하게 관리하진 못합니다. 며칠 밀릴 때도 있고, 현금 지출은 자주 까먹습니다. 그래도 예전보다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훨씬 덜 막연합니다. 생활비가 찝찝하게 느껴질 때, 엑셀 한 장을 열어보는 것만으로도 꽤 현실적인 답이 나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