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체인소맨 1기를 다시 틀었다가, 이상하게 본편보다 엔딩을 더 오래 돌려봤습니다. 보통 애니메이션 엔딩은 한두 번 듣고 넘기는 편인데, 체인소맨은 매회 다른 엔딩을 붙여버리니까 그냥 스킵하기가 애매하더라고요. 12화짜리 시즌에 엔딩곡이 12개. 이건 단순한 팬서비스라기보다, 각 화의 감정선을 끝까지 끌고 가는 별도 장치에 가깝습니다.
특히 체인소맨 엔딩은 노래만 좋은 게 아니라 영상 톤이 매번 확 달라집니다. 어떤 회차는 뮤직비디오처럼 튀고, 어떤 회차는 악몽처럼 찝찝하고, 어떤 회차는 캐릭터의 속내를 슬쩍 비추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정주행할 때 엔딩을 넘기면 에피소드 하나를 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왜 체인소맨 엔딩은 매회 달랐을까
체인소맨 1기는 12화 구성인데, 엔딩도 정확히 12곡입니다. 보통 한 쿨 애니메이션은 오프닝 1곡, 엔딩 1곡으로 밀고 가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이 작품은 에피소드마다 아티스트와 영상 콘셉트를 바꿨습니다. Vaundy, 즛토마요, 맥시멈 더 호르몬, TOOBOE, syudou, Kanaria, ano, TK, Aimer, PEOPLE 1, Queen Bee, Eve까지 이름만 봐도 꽤 공격적인 라인업입니다.
이 방식이 잘 맞았던 이유는 체인소맨이라는 작품 자체가 한 가지 장르로 얌전히 묶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액션물처럼 시작했다가, 블랙코미디처럼 굴러가고, 갑자기 청춘물 같은 얼굴을 했다가, 다음 순간 피 냄새 나는 호러로 꺾입니다. 그러니 엔딩도 매번 다른 얼굴을 갖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음악이 작품을 꾸미는 게 아니라, 그 회차의 뒷맛을 맡아서 처리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초반 엔딩은 덴지의 에너지와 잘 맞는다
초반부 엔딩들은 대체로 속도가 빠르고, 색감도 강합니다. 덴지라는 캐릭터가 처음 등장할 때 주는 인상과 닮아 있어요. 욕망이 단순하고, 반응이 빠르고, 앞뒤 계산보다 지금 눈앞의 감각에 확 끌려가는 인물. 그래서 초반 엔딩들은 체인소맨의 거친 추진력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1화 엔딩인 Vaundy의 곡은 시작점 역할을 꽤 깔끔하게 합니다. 덴지의 처지를 너무 비장하게만 끌고 가지 않고, 이상하게 발랄한 구석까지 같이 보여주거든요. 체인소맨이 잔혹한 세계관을 다루면서도 마냥 우울한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피가 튀는데 리듬은 살아 있고, 괴로운데 이상하게 웃깁니다.
3화의 맥시멈 더 호르몬 엔딩은 훨씬 노골적입니다. 정신없고 과격하고, 보는 사람을 밀어붙입니다. 솔직히 취향을 좀 탈 수 있어요. 깔끔한 멜로디를 기대하면 당황할 수 있는데, 체인소맨의 폭주감만 놓고 보면 이만큼 직관적인 엔딩도 드뭅니다. 화면과 음악이 같이 난리를 치니까, 에피소드가 끝났는데도 몸이 바로 진정되지 않습니다.
중반부터는 캐릭터의 그림자가 짙어진다
중반 엔딩으로 갈수록 단순한 흥분보다 캐릭터의 결핍과 불안이 더 크게 보입니다. 체인소맨을 처음 보면 덴지의 엉뚱함에 많이 웃게 되지만, 조금 지나면 이 인물이 왜 이렇게 작은 행복에 매달리는지 보이기 시작하죠. 엔딩 영상들도 그 지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ano의 엔딩은 밝고 귀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꽤 기괴합니다. 체인소맨 특유의 귀여움과 불편함이 같이 붙어 있는 느낌이에요. 이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 양면성에 있습니다. 마냥 멋있기만 한 악마 사냥도 아니고, 마냥 처절하기만 한 생존기도 아닙니다. 웃긴데 쓸쓸하고, 귀여운데 어딘가 망가져 있습니다.
TK의 엔딩은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감정선을 날카롭게 잡아당기는 타입이라, 앞선 회차들의 정신없는 에너지와 비교하면 훨씬 차갑게 느껴집니다. 이런 배치가 좋은 이유는 정주행할 때 작품의 온도가 서서히 바뀌는 걸 체감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초반엔 덴지의 질주를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이 세계가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는 걸 알게 됩니다.
스포 없이 말하는 후반 엔딩의 맛
후반부 엔딩은 스포를 피해서 말하기가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분위기만 이야기하면, 캐릭터들 사이의 거리감과 사건 이후의 여운이 훨씬 강해집니다. Aimer, Queen Bee, Eve의 곡들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후반의 정서를 받아냅니다. 어떤 곡은 우아하게, 어떤 곡은 음산하게, 어떤 곡은 이상하게 아름답게 남습니다.
특히 Queen Bee의 엔딩은 비주얼과 보컬의 존재감이 강해서 호불호가 분명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엔딩이 체인소맨의 불온한 매력을 꽤 잘 잡았다고 봤습니다. 보기 편한 영상은 아닌데, 자꾸 다시 보게 되는 쪽입니다. 체인소맨 자체가 원래 그렇잖아요. 불편한 장면이 많은데도 캐릭터의 리듬과 세계의 이상한 활력이 계속 붙잡습니다.
Eve의 엔딩은 시즌의 끝부분에 어울리는 감각이 있습니다. 시원하게 닫아주는 느낌이라기보다, 아직 이 세계가 더 이어질 것 같은 여지를 남깁니다. 체인소맨을 다 보고 나서 마음이 개운하기보다 묘하게 허전했다면, 그 감각은 엔딩 연출이 꽤 크게 만든 것 같아요.
정주행할 때 엔딩을 넘기기 아까운 이유
체인소맨 엔딩의 재미는 순위를 매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물론 개인 취향으로 좋아하는 곡은 갈립니다. 저는 반복해서 듣기 좋은 곡과, 영상까지 봐야 힘이 나는 곡이 따로 있었습니다. 어떤 엔딩은 플레이리스트에 넣기 좋고, 어떤 엔딩은 에피소드 직후에 봐야 제대로 살아납니다.
- 노래 중심으로 들으면 Vaundy, Aimer, Eve 쪽이 접근성이 좋습니다.
- 작품의 광기를 보고 싶다면 맥시멈 더 호르몬, ano, Queen Bee 쪽이 강하게 남습니다.
- 회차 감정선과 붙여서 보면 TK, PEOPLE 1, 즛토마요 엔딩의 인상이 더 선명해집니다.
근데 결국 체인소맨 엔딩은 취향표를 만드는 재미보다, 매회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다시 씹게 만든다는 점이 큽니다. 방금 본 에피소드를 음악과 이미지로 한 번 더 비틀어 보여주니까, 다음 화로 바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멈추게 됩니다. 정주행할 때 이 잠깐의 멈춤이 은근히 중요하더라고요.
솔직히 모든 엔딩이 똑같이 마음에 든 건 아닙니다. 어떤 곡은 제 취향보다 훨씬 과했고, 어떤 영상은 처음 볼 때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체인소맨이라는 작품을 생각하면 그 과함마저도 꽤 잘 어울립니다. 얌전하게 평균점만 노린 엔딩이었다면 이렇게 오래 얘기할 거리도 없었을 겁니다. 저는 다음에 다시 정주행해도 오프닝만 보고 넘기지 않고, 엔딩까지 천천히 붙잡고 갈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