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엔 나이부터 눈에 들어왔다
얼마 전 고효준의 울산 웨일즈 계약 소식을 다시 찾아보다가, 솔직히 가장 먼저 멈춘 숫자는 ‘43세’였다. 야구에서 43세 투수라는 말은 그냥 베테랑이라는 표현으로 다 담기 어렵다. 타자도 아니고, 매일 어깨와 팔꿈치에 부담이 쌓이는 투수다. 게다가 좌완 불펜은 짧은 이닝을 던져도 준비 과정이 거칠다. 불펜에서 몸을 풀고, 상황을 기다리고, 등판이 무산되면 다시 식었다가 다음 날 또 준비한다. 이 루틴을 20대도 버거워하는데 고효준은 1983년생으로 그 시간을 버텼다.
울산이 2026년 3월 고효준을 영입했을 때 반응이 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순히 이름값 있는 선수가 새 팀에 갔다는 정도가 아니었다. 프로야구 최초 시민구단을 표방한 울산 웨일즈가 창단 첫 시즌에 어떤 색깔을 만들 것인가, 그리고 고효준이 현역 연장의 마지막 기회를 실제 경기력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가 동시에 걸려 있었다.
울산이 고효준을 원한 이유는 기록지에만 있지 않았다
고효준의 1군 통산 기록은 646경기, 49승 55패, 4세이브, 65홀드, 평균자책점 5.31이다. 숫자만 떼어놓고 보면 완벽한 지배형 투수의 이력은 아니다. 그런데 불펜 투수의 가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긴 시즌을 버티는 팀에는 ‘계산 가능한 사람’이 필요하다. 특히 신생팀은 더 그렇다. 경기 중반 한 번 흔들리면 팀 전체 리듬이 무너지고, 어린 투수들은 그 경험을 감당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울산 구단이 고효준에게 기대한 지점도 불펜 안정감과 멘토 역할이었다. 이건 흔한 홍보 문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꽤 현실적인 판단이다. 2002년 롯데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뒤 SK, KIA, 롯데, LG, SSG, 두산을 거친 투수라면 웬만한 경기 흐름은 몸으로 알고 있다. 연패 중인 팀의 불펜 분위기, 1점 차 리드에서 좌타자를 상대하는 압박, 시즌 막판 체력 저하까지 겪어본 선수다. 신생팀 입장에선 이런 경험 자체가 훈련장 안의 교재가 된다.
43세에도 시속 148km, 이 숫자가 꽤 세다
개인적으로 이 계약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구속이었다. 고효준은 울산 합류 뒤 인터뷰에서 트랙맨 기준 최고 시속 148km까지 나왔다고 밝혔다. 43세 좌완이 148km를 찍는다는 건 단순한 화제가 아니다. 물론 구속 하나로 투수의 현재 가치를 전부 판단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나이를 감안하면 몸이 아직 경쟁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됐다는 신호다.
실제 퓨처스리그 성적도 이야기를 받쳐준다. 2026시즌 울산에서 33경기에 등판해 2승 2패, 5세이브, 7홀드, 평균자책점 2.45를 기록했다. 12경기 시점에는 1승 4홀드, 평균자책점 1.98로 출발도 좋았다. 나이가 만든 서사에만 기대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효준은 퓨처스리그에서 최고령 승리, 세이브, 홀드 기록을 이어가며 ‘아직 던질 수 있다’는 말을 기록으로 남겼다.
여기서 재미있는 건 고효준의 목표가 단순히 퓨처스리그 생존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KBO리그에서 베테랑이 어떤 건지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계약 조건상 다른 구단이 부르면 바로 갈 수 있다는 식의 말도 남겼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꽤 선명한 경쟁심이 있었다. 몸은 준비돼 있고, 상황만 열리면 다시 1군 마운드에 서겠다는 태도였다.
계약이 눈길을 끈 진짜 이유는 ‘시간과의 승부’였다
스포츠에서 나이는 늘 잔인한 기준표처럼 따라붙는다. 30대 중반만 넘어도 ‘관리’라는 단어가 붙고, 40대가 되면 매 경기 자체가 예외처럼 소비된다. 고효준의 울산 계약이 눈길을 끈 건 바로 그 기준표를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는 코치직 제안이 있었던 상황에서도 선수 생활을 택했다. 보장된 다음 역할보다 불확실한 등판 기회를 선택한 셈이다.
그런데 이 선택은 낭만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울산은 창단 첫 시즌부터 이기는 야구를 추구했고, 고효준은 그 안에서 실제 전력으로 쓰였다. 베테랑이 어린 선수들에게 말로만 조언하는 구조가 아니라, 본인이 먼저 마운드에서 결과를 보여주는 구조였다. 이 차이가 크다. 스포츠 라커룸에서 가장 강한 설득은 결국 경기력에서 나온다. 말이 길어도 공이 안 좋으면 무게가 줄고, 말이 짧아도 경기를 막아내면 후배들이 귀를 연다.
- 2002년 프로 데뷔 이후 25년간 현역 생활을 이어갔다.
- 2026년 울산에서 33경기 평균자책점 2.45를 남겼다.
- 1군 통산 646경기 등판이라는 긴 생존 기록을 만들었다.
- 퓨처스리그 최고령 승리, 세이브, 홀드 기록을 세웠다.
은퇴까지 이어진 울산의 한 시즌
고효준은 2026년 6월 28일 울산 문수야구장에서 은퇴식을 치르며 25년 프로 생활을 끝냈다. 시즌 초반 계약 소식이 ‘도전’으로 읽혔다면, 은퇴 시점의 기록은 ‘증명’에 가까웠다. 1군 복귀와 KBO 최고령 승리 기록 경신까지는 닿지 못했다. 송진우가 남긴 KBO리그 최고령 승리 기록이라는 벽은 끝내 넘지 못했다. 그래도 퓨처스리그에서 43세 투수가 실전 성적을 남기고, 신생 시민구단의 첫 시즌 문화 형성에 영향을 줬다는 사실은 작지 않다.
사실 팬 입장에서 이런 선수의 마지막 시즌은 승패표보다 오래 남는다. 압도적인 전성기 숫자만 기억되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커리어 말미의 선택 때문에 다시 보이는 선수도 있다. 고효준의 울산 계약은 후자에 가깝다. 43세라는 숫자가 처음엔 시선을 끌었지만, 더 오래 남는 건 그 나이에 다시 유니폼을 입고 경쟁하려 했던 태도다. 기록은 언젠가 깨질 수 있다. 그런데 ‘끝났다고 보이는 순간에도 한 번 더 던지려 한 선수’라는 이미지는 꽤 오래 팬들 머릿속에 남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