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볼 어스 정주행해봤더니, 얼어붙은 지구보다 마음이 더 시렸다

스노우볼 어스 정주행해봤더니, 얼어붙은 지구보다 마음이 더 시렸다

처음엔 괴수 로봇물인 줄 알았는데

얼마 전 가볍게 SF 애니 한 편 틀었다가 생각보다 오래 붙잡혀 있었다. 제목부터 스노우볼 어스라서 지구가 꽁꽁 언 재난물인가 싶었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거대 로봇, 우주 괴수, 냉동 수면, 멸망 이후의 지구가 한꺼번에 들어온다. 설정만 보면 꽤 거칠고 장르 욕심이 많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의외로 감정선이 먼저 보인다.

주인공 야부사메 테츠오는 사람과 어울리는 데 서툰 소년이다. 그런 그가 의식을 가진 로봇 유키오와 만나고, 인류를 구하는 전투에 휘말린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익숙한 소년 성장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작품은 초반부터 승리의 짜릿함보다 그 뒤에 남는 고립감과 약속을 더 진하게 남긴다. 1회가 23분 안팎이라 템포는 빠른 편인데, 감정은 이상하게 천천히 내려앉는다.

눈 덮인 지구가 배경이 아니라 감정이다

스노우볼 어스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히 얼어붙은 지구다. 도시도, 길도, 사람들이 남긴 흔적도 전부 눈과 얼음 아래 묻혀 있다. 보통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먼지, 폐허, 녹슨 철골의 이미지가 강한데, 이 작품은 흰색을 많이 쓴다. 그래서 더 차갑고 조용하다. 화면이 시끄럽지 않은데도 불안하다.

테츠오가 냉동 수면에서 깨어난 뒤 마주하는 세계는 단순히 ‘망한 세상’이 아니다. 내가 알던 시간이 사라졌고, 내가 지키려 했던 사람들도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감각이 크다. 그래서 관전 포인트는 괴수와 싸우는 장면만이 아니다. 오히려 테츠오가 새로운 생존자들을 만나면서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를 지켜보는 쪽이 더 맛있다. 노기 아오, 타키무라 하가네, 이즈미 나유타 같은 인물들이 들어오면서 작품의 온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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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지점과 호불호 갈릴 지점

개인적으로 좋았던 건 유키오와 테츠오의 관계다. 인간과 로봇의 우정은 이미 많이 본 소재인데, 여기서는 그 관계가 지나치게 귀엽거나 감상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유키오는 병기이면서 친구이고, 테츠오에게는 세상과 이어지는 통로 같은 존재다. 그래서 둘의 약속이 이후 전개에 계속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다만 호불호는 꽤 갈릴 수 있다. 설정 밀도가 높은 편이라 초반에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온다고 느낄 수 있다. 우주 괴수와 로봇 전투를 기대하고 들어온 사람에게는 생존 드라마 파트가 길게 느껴질 수 있고, 반대로 감정극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전투 설정이 다소 만화적으로 보일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작품은 양쪽을 모두 깔끔하게 분리해서 보여주는 타입은 아니다. 장르가 섞여 있는 맛을 즐겨야 더 잘 맞는다.

  • 거대 로봇과 괴수 전투를 좋아한다면 초반 진입이 쉽다.
  • 멸망 이후 생존자 공동체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중반부가 더 흥미롭다.
  • 빠른 설명보다 분위기와 관계 변화를 보는 쪽이면 만족도가 높다.
  • 세계관을 아주 촘촘하게 따지는 취향이라면 몇몇 전개가 투박하게 느껴질 수 있다.

스포 없이 보는 관전 포인트

스포를 피해서 말하면, 스노우볼 어스는 ‘누가 적인가’보다 ‘무엇을 믿고 계속 걸어갈 것인가’에 가까운 작품이다. 테츠오는 영웅으로 불리지만, 본인은 그 이름을 감당하기 버거워한다. 이 지점이 꽤 좋다. 세상을 구한 소년이 멋있게 돌아오는 게 아니라, 엉망이 된 세계 앞에서 다시 멈칫거린다. 그 어색함이 캐릭터를 살린다.

또 하나는 공간이다. 눈 덮인 평원, 폐허가 된 도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가 나올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진다. 특히 생존자들이 만든 생활권은 작품의 장르를 조금 바꿔놓는다. 전투물에서 갑자기 공동체 드라마로 넘어가는 느낌이 있는데, 그 변화가 마음에 들면 정주행이 훨씬 편하다.

추천하고 싶은 사람

에반게리온식 심리극을 기대하면 방향이 조금 다르고, 전형적인 슈퍼로봇물의 통쾌함만 원해도 살짝 결이 다르다. 대신 소년과 로봇의 관계, 얼어붙은 세계에서 다시 사람을 만나는 이야기, 멸망 이후에도 약속 하나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꽤 잘 맞는다. 1기 13화 구성으로 알려진 작품이라 하루에 몰아보기에도 부담은 크지 않다. 다만 감정선이 뒤로 갈수록 누적되는 타입이라, 중간에 띄엄띄엄 보기보다는 2~3회씩 이어 보는 쪽이 맛이 산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면서 ‘지구가 얼었다’는 설정보다 ‘사람이 얼어붙지 않으려면 뭘 붙잡아야 하나’ 쪽을 더 많이 생각했다. 화려한 전투보다 조용한 장면이 오래 남는 애니였고, 그게 스노우볼 어스의 이상한 매력이다. 차갑게 시작해서 은근히 사람 온도를 찾게 만드는 작품이라, SF 액션을 빌린 관계 드라마로 봐도 꽤 괜찮았다.

스노우볼 어스 정주행해봤더니, 얼어붙은 지구보다 마음이 더 시렸다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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