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KIA 선발 라인업을 보다가 손이 잠깐 멈췄다. 이름만 보면 낯설고, 자리만 보면 파격적인데, 경기 흐름까지 붙여 보면 이범호 감독이 단순히 타순을 흔드는 게 아니라 팀의 체질을 다시 만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숫자는 아직 KIA가 버티고 있다고 말한다
9월 20일 창원 NC전 8-6 재역전승까지 더하면 KIA는 71승 2무 57패, 4위권을 지키며 3연승 흐름을 만들었다. KBO 기록실 기준 직전까지도 승률은 5할 중반대였고, 팀 타율 0.272, 평균자책점 4.28, 홈런 158개라는 지표가 찍혀 있었다. 엄청 매끈한 팀은 아니다. 그런데 장타 한 방과 후반 집중력으로 버티는 힘은 분명하다.
재미있는 건 이 팀의 모양이다. 도루 75개보다 홈런 158개가 더 먼저 눈에 들어오고, 병살 97개와 실책 93개도 같이 따라온다. 즉 KIA는 시원하게 치는 장점이 있지만, 연결이 끊기거나 수비가 흔들리면 경기 전체가 꽤 거칠어질 수 있는 팀이다. 그래서 라인업 대수술은 분위기 전환용 이벤트가 아니라, 장타형 팀이 가진 빈틈을 메우는 작업에 가깝다.
이범호 승부수는 이름값보다 기능 배치에 가깝다
팬 입장에서는 익숙한 이름이 빠지면 먼저 불안해진다. 김도영 같은 중심축이 국제대회로 자리를 비우거나, 베테랑의 컨디션을 관리해야 하는 시점이면 더 그렇다. 그런데 이범호 감독의 최근 선택을 보면 누가 더 유명한가보다 그날 어떤 기능이 필요한가를 먼저 보는 쪽에 가깝다.
9월 19일 NC전에서는 윤도현이 1번 3루수로 들어갔고, 한준수, 카스트로, 나성범, 김선빈이 뒤를 받쳤다. 다음 날에는 박정우가 1번 좌익수로 나서 8회 2사 만루에서 싹쓸이 3루타를 터뜨렸다. 이 장면이 꽤 상징적이었다. 라인업 변화가 단순한 실험으로 끝났다면 그냥 어수선한 경기였겠지만, 실제 승부처에서 대체 카드가 점수를 만들었다.
- 윤도현 기용은 김도영 공백을 메우는 3루 테스트 성격이 강했다.
- 박정우 전진 배치는 외야 공백과 출루, 주루를 동시에 고려한 선택이었다.
- 한준수와 카스트로의 상위·중심 연결은 장타 의존도를 낮추려는 흐름으로 읽힌다.
장타형 팀이라 더 필요한 건 연결이다
KIA 타선은 폭발력만 놓고 보면 여전히 매력적이다. 시즌 OPS 흐름에서 김도영은 1.053 수준의 압도적인 생산력을 보였고, 카스트로와 나성범도 0.900대 OPS로 중심을 잡았다. 한준수, 박재현까지 0.800 안팎의 생산성을 보여주면 상대 배터리 입장에서는 쉬어갈 구간이 많지 않다.
문제는 홈런 많은 팀이 항상 안정적인 팀은 아니라는 점이다. 장타는 경기를 뒤집는 힘이지만, 1점 싸움에서는 볼넷 하나, 희생플라이 하나, 1루에서 3루까지 가는 주루 하나가 더 크게 보인다. 박정우의 8회 3타점 3루타가 강렬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 타구 하나에는 장타력도 있었지만, 앞에서 주자를 모아둔 과정이 같이 있었다.
사실 이범호 감독의 승부수는 타순 한 칸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박재현을 1번으로 써보며 리드오프 가능성을 확인하고, 박정우에게 빈자리를 맡기고, 한준수의 타격감을 활용하는 식으로 라인업 안의 역할을 재배치하는 쪽이다. 강한 타자를 많이 세우는 것과 점수가 나는 순서를 만드는 건 다르다. 지금 KIA가 건드리는 부분이 바로 그 사이에 있다.
위험도도 분명하다
라인업 대수술은 성공하면 과감한 운영이지만, 실패하면 선수단 전체가 흔들려 보인다. 특히 KIA처럼 수비 실책 수가 적지 않은 팀은 포지션 변화가 공격보다 먼저 수비 리듬을 건드릴 수 있다. 3루, 외야, 하위타순을 자주 바꾸면 선수마다 준비 루틴이 달라지고, 경기 후반 대수비·대타 카드 계산도 복잡해진다.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가만히 버티는 쪽이 더 안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4위권을 지키는 팀은 아래를 신경 써야 하고, 동시에 3위도 봐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전 고정만으로는 버티기 어렵다. 체력 관리, 상대 선발 유형, 남은 일정, 불펜 소모까지 묶어서 하루 라인업을 짜야 한다.
- 상위타순은 출루와 주루 압박을 더 만들어야 한다.
- 중심타선은 김도영 공백 때도 장타 생산을 유지해야 한다.
- 하위타순은 수비 안정과 한 번의 찬스 해결 능력이 필요하다.
가을 앞에서 꽤 현실적인 선택이다
NC전 8연패를 끊고 바로 다음 경기까지 잡은 흐름은 작지 않다. 특정 팀에 눌리던 기억을 지웠고, 8회에 6점을 몰아치는 방식으로 이겼다. 이런 승리는 단순한 1승보다 라커룸에 남는 온도가 다르다. 특히 박정우처럼 기존 주연이 아니던 선수가 승부를 뒤집으면, 벤치의 선택에도 힘이 붙는다.
KIA 라인업 대수술은 보기보다 차갑고 현실적인 승부수다. 김도영, 나성범, 카스트로 같은 확실한 축을 살리면서도 그 주변을 계속 움직여 가장 잘 터지는 조합을 찾는 과정이다. 팬으로서는 매일 선발표를 볼 때마다 놀랄 수밖에 없지만, 지금 KIA 야구의 재미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익숙한 이름의 안정감보다, 낯선 배치가 만들어내는 다음 장면을 기다리게 하는 힘. 이범호 감독의 선택이 시즌 막판 어떤 표정으로 남을지 꽤 오래 지켜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