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요리교실에서 수강생 한 분이 냉장고 사진을 보여주셨어요. 두부 한 모, 애호박 반 개, 시든 대파, 계란 네 알이 있는데도 저녁을 못 정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식단이 어려운 이유는 요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재료를 어떻게 이어서 쓸지 감이 안 잡혀서입니다. 주방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메뉴보다 먼저 보는 게 있어요. 냉장고에 뭐가 있고, 며칠 안에 먹어야 하고, 불 앞에 설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입니다.
집밥 식단은 거창하게 7일치 표를 예쁘게 채우는 일이 아닙니다. 밥, 국이나 찌개, 단백질 반찬, 채소 반찬을 너무 무겁지 않게 돌리는 일에 가깝습니다. 재료를 다 갖추려 하면 금방 지치고, 매끼 새 요리를 하려 하면 설거지부터 밀립니다. 그래서 저는 요리교실에서도 식단을 짤 때 ‘새 메뉴’보다 ‘이어 쓰기’를 먼저 잡으라고 말씀드립니다.
식단은 메뉴보다 기준을 먼저 잡아야 편합니다
처음부터 월요일 제육볶음, 화요일 된장찌개, 수요일 닭볶음탕처럼 메뉴 이름을 박아두면 중간에 한 번만 틀어져도 전체가 무너집니다. 대신 기준을 잡으면 훨씬 편합니다. 예를 들면 하루 한 끼는 국물 있는 밥상, 하루 한 끼는 볶음이나 덮밥, 남은 반찬이 쌓이면 비빔밥이나 김밥처럼 합치는 식입니다.
제가 집에서 가장 자주 쓰는 기본 틀은 이렇습니다. 밥은 한 번에 3컵 정도 지어 2일 안에 먹고, 국물은 2회분만 끓입니다. 단백질은 고기, 생선, 두부, 계란 중 하나만 정해도 충분합니다. 채소는 색으로 보면 편해요. 초록 하나, 흰색이나 노란색 하나, 김치나 장아찌처럼 짠맛 하나를 두면 밥상이 비어 보이지 않습니다.
- 밥: 쌀 3컵 기준으로 2인 가정은 2일 정도
- 국물: 2회분만 끓여야 질리지 않음
- 단백질: 한 끼에 손바닥 크기 한 장 또는 계란 2개 정도
- 채소: 익힌 채소와 생채소를 섞으면 씹는 맛이 살아남
식단이 자꾸 실패한다면 메뉴 수를 줄여야 합니다. 반찬 다섯 가지를 만들겠다고 시작하면 불 조절도 바쁘고 양념도 헷갈립니다. 처음에는 밥, 국, 메인 반찬 하나, 김치 정도면 충분합니다. 여기에 남은 나물이나 구운 김이 있으면 그날은 이미 잘 차린 밥상입니다.
장보기 전에는 냉장고를 5분만 봅니다
식단을 짜기 전에 장부터 보면 거의 과하게 삽니다. 저도 주방 초반에는 그랬어요. 애호박이 싸면 두 개 사고, 버섯이 좋아 보이면 한 팩 더 사고, 그러다 냉장고 안에서 서로 늙어갑니다. 집밥 식단은 장보기 목록보다 냉장고 확인이 먼저입니다.
냉장고를 볼 때는 세 칸으로 나누면 쉽습니다. 오늘 먹어야 하는 재료, 2~3일 안에 먹을 재료, 오래 두어도 되는 재료입니다. 예를 들어 시금치가 숨이 죽기 시작했다면 그날 바로 데쳐야 합니다. 데칠 때 물 1리터에 소금 1작은술을 넣고, 줄기부터 넣어 30초 정도만 익히면 색이 덜 죽습니다. 오래 데치면 나물 양념을 해도 물컹해서 손이 잘 안 갑니다.
남은 재료가 애매할 때는 국물로 묶으면 됩니다. 애호박 반 개, 양파 1/4개, 두부 반 모가 있으면 된장찌개가 되고, 대파와 계란만 있어도 계란국이 됩니다. 계란국은 물 600ml에 국간장 1큰술, 다진 마늘 1/3작은술이면 충분합니다. 끓는 물에 계란을 바로 붓지 말고, 불을 중불로 낮춘 뒤 젓가락으로 가늘게 흘리면 몽글몽글하게 풀립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계란이 덩어리로 뭉쳐서 국물이 탁해집니다.
3일 식단으로 시작하면 부담이 덜합니다
일주일 식단을 한 번에 짜면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변수가 많습니다. 회식이 생기고, 배달 음식을 먹고 싶어지고, 아이가 갑자기 다른 반찬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3일만 잡는 게 좋습니다. 3일은 재료가 상하기 전까지 굴리기 좋은 길이입니다.
예를 들어 닭다리살 600g, 두부 1모, 애호박 1개, 콩나물 1봉, 계란 6개를 샀다고 해볼게요. 첫날은 닭다리살 간장구이와 콩나물국을 합니다. 닭다리살은 간장 2큰술, 맛술 1큰술, 설탕 1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에 20분만 재워도 충분합니다. 팬은 중불로 예열하고 껍질 쪽부터 5분, 뒤집어서 4분 정도 굽습니다. 센 불로 시작하면 겉은 타고 속은 덜 익습니다.
둘째 날은 남은 닭고기를 잘게 찢어 덮밥으로 씁니다. 밥 위에 닭고기, 계란 스크램블, 남은 콩나물을 올리고 고추장 1큰술에 참기름 1작은술을 섞으면 됩니다. 셋째 날은 두부와 애호박으로 된장찌개를 끓입니다. 물 700ml에 멸치육수팩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쌀뜨물도 괜찮습니다. 된장은 처음부터 2큰술을 다 넣지 말고 1큰술 반만 풀고 끓인 뒤 간을 보세요. 된장마다 짠맛 차이가 꽤 큽니다.
초보자가 자주 놓치는 양 조절
식단을 짤 때 가장 많이 남는 건 채소입니다. 채소는 익히면 줄어드니까 많이 넣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손질 전에는 부피가 커서 냉장고를 금방 차지합니다. 2인 기준으로 애호박은 한 끼에 반 개, 양파는 1/4~1/2개, 버섯은 한 줌이면 충분합니다. 국에 들어가는 대파는 10cm만 썰어도 향이 납니다.
밥 양도 중요합니다. 쌀 1컵은 보통 밥 2공기 정도가 나옵니다. 2인 가정에서 매끼 밥을 먹는다면 쌀 3컵이 2일치에 가깝고, 아침을 빵이나 과일로 먹는 집이라면 더 줄여야 합니다. 밥이 남으면 냉장보다 냉동이 낫습니다. 뜨거운 김만 살짝 빼고 1공기씩 담아 얼리면 다시 데웠을 때 훨씬 덜 마릅니다.
대체 재료를 정해두면 식단이 덜 흔들립니다
식단표에 적힌 재료가 없다고 바로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돼지고기 앞다리살이 없으면 닭다리살이나 두부로 바꿀 수 있고, 애호박이 없으면 양배추나 버섯을 넣어도 됩니다. 다만 양념은 조금 조절해야 합니다. 두부는 고기보다 물이 많아서 간장 양념을 그대로 쓰면 싱거워질 수 있습니다. 두부 1모를 부칠 때는 간장 1큰술 반, 물 2큰술, 고춧가루 1작은술 정도로 시작하면 안정적입니다.
국물 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가 없으면 양파를 조금 더 넣어 단맛을 내고, 멸치육수가 없으면 참치액 1작은술이나 국간장으로 보완할 수 있습니다. 단, 액젓이나 참치액은 처음부터 많이 넣으면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600~700ml 국물에는 1작은술부터 넣고 끓인 뒤 간을 봅니다. 주방에서 배운 건 간은 한 번에 맞추는 게 아니라 두 번에 나눠 잡는 게 훨씬 안정적이라는 점입니다.
- 돼지고기 대신 닭고기: 굽는 시간은 조금 줄이고 속까지 익었는지 확인
- 고기 대신 두부: 양념은 짜지 않게, 마지막에 끼얹기
- 애호박 대신 양배추: 익는 시간이 더 걸리니 먼저 넣기
- 멸치육수 대신 쌀뜨물: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에 잘 맞음
실패했을 때는 버리지 말고 방향을 바꿉니다
식단대로 했는데 맛이 안 맞을 때가 있습니다. 찌개가 짜면 물만 붓지 말고 두부나 감자처럼 간을 받아주는 재료를 넣는 게 좋습니다. 물만 늘리면 깊은 맛도 같이 흐려집니다. 반대로 국물이 싱거우면 소금부터 넣기보다 국간장 1작은술을 먼저 넣어보세요. 향과 간이 같이 올라옵니다.
볶음이 질척해졌다면 팬을 넓게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채소가 겹쳐 있으면 볶는 게 아니라 찌는 쪽으로 갑니다. 이럴 때는 재료를 반만 덜어내고 센 불에서 1분 정도 수분을 날린 뒤 다시 합치면 낫습니다. 고기가 퍽퍽해졌다면 잘게 찢어 양념장에 무치거나 덮밥으로 돌리면 됩니다. 실패한 반찬도 방향만 바꾸면 다음 끼니가 됩니다.
저는 식단을 잘 짜는 사람은 요리를 많이 아는 사람보다 자기 집의 속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퇴근이 늦은 집은 20분 안에 끝나는 국과 볶음이 맞고, 주말에 시간이 있는 집은 고기 양념이나 육수를 미리 해두면 평일이 편해집니다. 재료를 빠짐없이 갖추는 것보다, 있는 재료를 덜 버리고 맛있게 이어 먹는 쪽이 훨씬 오래 갑니다. 집밥은 그렇게 조금씩 자기 집 방식으로 맞춰지는 게 제일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