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폭이 좁은 주방을 꾸미면서 800 주방수납장 하나를 놓고도 자리를 세 번 바꿨습니다. 벽면 치수에는 들어맞았는데, 문을 열 때마다 식탁 의자와 부딪혔거든요. 수납장은 빈 벽을 채우는 가구가 아니라 매일 물건을 꺼내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품 사진보다 먼저 그 앞에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봅니다.
800은 보통 가로 폭 800mm를 뜻합니다. 같은 폭이어도 깊이와 높이, 문이 열리는 방식에 따라 주방에서 차지하는 느낌은 꽤 다릅니다. 특히 작은 주방에서는 5cm 차이로 서랍을 끝까지 열 수 있는지가 갈립니다.
폭 800mm보다 앞쪽 공간을 먼저 재세요
줄자를 들었다면 벽의 빈 폭만 재지 말고 수납장 앞까지 함께 보세요. 문을 열고 사람이 서서 그릇을 꺼낼 자리가 필요합니다. 맞은편에 식탁이나 냉장고가 있다면 의자를 빼거나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도 동선이 겹치지 않아야 하고요. 바닥에 테이프로 수납장 크기를 표시한 뒤 하루 정도 평소처럼 움직여 보면 도면에서 놓친 불편이 보입니다.
깊이는 넣을 물건으로 결정하는 편이 낫습니다. 접시와 식재료를 주로 둘 거라면 깊은 장이 꼭 유리하지는 않습니다. 뒤쪽 물건이 안 보이면 같은 식재료를 다시 사게 되거든요. 반대로 밥솥이나 에어프라이어처럼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가전을 넣을 계획이라면 본체 치수에 더해 손을 넣고 코드를 뺄 공간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가전은 사용 중 열이 날 수 있으니 제품 설명서에 적힌 주변 여유 공간도 따르세요.
- 벽에서 식탁이나 맞은편 가구까지의 거리
- 수납장 문과 서랍이 끝까지 열리는 범위
- 걸레받이, 콘센트, 창문 손잡이가 닿는 위치
- 수납장 위나 옆에서 사용할 가전의 실제 크기
자주 쓰는 물건이 놓일 높이를 보세요
수납 용량이 커 보여도 손이 자주 닿는 칸이 불편하면 금세 상판으로 물건이 올라옵니다. 제가 맡았던 한 집은 새 수납장의 가장 높은 칸에 매일 쓰는 컵을 넣어 두셨더군요. 며칠 뒤 컵은 모두 싱크대 옆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수납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자리가 생활과 맞지 않았던 거죠.
매일 쓰는 그릇과 컵은 허리에서 눈높이 사이에 두고, 무거운 냄비와 쌀은 아래쪽에 두면 꺼내기가 수월합니다. 명절 그릇이나 여분의 소모품은 위 칸으로 보내도 괜찮고요. 칸 높이를 조절할 수 있는 제품이라면 실제로 쓰는 그릇을 몇 개 재서 선반 간격을 잡으세요. 선반마다 빈 공간을 크게 남기기보다 물건을 무리 없이 넣고 뺄 정도로 맞추는 편이 오래 편합니다.
여닫이문과 서랍 중에서는 내용물이 잘 보이는 쪽을 고르세요. 깊은 하부장에 작은 양념통을 여러 줄로 쌓으면 맨 뒤까지 손이 잘 안 갑니다. 이런 물건은 얕은 서랍이나 꺼낼 수 있는 바구니가 낫습니다. 다만 서랍은 끝까지 당길 앞 공간이 있어야 하니, 통로가 좁다면 문 안에 바구니를 나눠 넣는 방식이 더 잘 맞을 수 있습니다.
예산은 상판보다 구조와 마감에 쓰세요
800 주방수납장을 찾다 보면 유리문, 홈 카페용 상판, 손잡이 디자인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예산이 같다면 저는 몸체가 흔들리지 않는지, 문을 여러 번 열고 닫아도 잘 맞는지부터 봅니다. 매일 여는 문짝이 처지거나 선반이 휘면 예쁜 색도 오래 즐기기 어렵습니다. 매장에서 볼 수 있다면 문을 열어 안쪽 모서리와 선반 지지 부품까지 확인하세요.
주방은 물과 기름이 닿기 쉬운 공간입니다. 상판에 커피 머신이나 물병을 올릴 예정이라면 물방울을 바로 닦기 쉬운 표면인지, 판재의 절단면까지 마감이 이어지는지 살펴보세요. 손잡이 주변의 복잡한 홈은 보기에는 근사해도 자주 닦아야 합니다. 청소에 시간을 많이 쓰고 싶지 않다면 표면이 매끈하고 틈이 적은 디자인이 편합니다.
추가 비용도 함께 계산해야 합니다. 배송과 설치, 기존 가구 이동 비용이 붙을 수 있고 내부 바구니를 여러 개 사면 처음 세운 예산을 넘기기 쉽습니다. 먼저 수납장 자체에 돈을 쓰고, 바구니는 물건을 채워 본 뒤 필요한 칸에만 사는 편이 낭비가 적습니다. 빈 장을 보며 수납용품부터 잔뜩 맞추면 오히려 물건을 그 크기에 억지로 맞추게 됩니다.
설치한 뒤에도 손이 가는 자리를 남기세요
설치 위치가 정해지면 벽과 수납장 사이, 바닥과 가구 아래를 어떻게 청소할지 생각해 보세요. 자투리 틈은 보기에는 작아도 먼지와 부스러기가 모이기 쉽습니다. 수납장을 벽에 바짝 붙이기 전에는 벽면의 습기 흔적도 확인하는 게 좋습니다. 키가 큰 장이거나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제조사가 안내한 방식으로 전도 방지 고정도 해두세요.
처음부터 모든 칸을 꽉 채우지는 않습니다. 자주 쓰는 물건을 먼저 넣고 일주일쯤 살아보면 어디에 손이 몰리는지 보입니다. 그때 선반 높이를 바꾸거나 바구니 하나를 추가하면 됩니다. 손이 닿기 편한 칸 하나를 비워 두면 장을 보거나 설거지를 마친 뒤에도 물건이 상판에 쌓이지 않더군요.
폭 800mm는 작은 주방에서 제법 넉넉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 무엇을 얼마나 넣을지만 생각하면 금방 다시 어수선해집니다. 문을 열고 꺼내고 닦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수납장이라면, 유행이 지나도 계속 쓰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