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예쁜 순우리말은 왜 오래 기억될까요?

1회
뜻이 예쁜 순우리말은 왜 오래 기억될까요?

얼마 전 학생이 강물 사진을 보여 주며 “반짝이는 부분을 윤슬이라고 쓰면 되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사진부터 다시 보자고 했어요. 물결이 보였고, 그 위에 햇빛이 잘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래, 바로 그 장면이야”라고 답했지요. 뜻이 예쁜 순우리말은 소리만 외울 때보다 그 말이 가리키는 모습을 함께 떠올릴 때 오래 남습니다.

물 위의 빛과 물이 흐르는 자리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입니다. 반짝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윤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유리창에 맺힌 빛보다 강이나 바다의 잔물결을 먼저 떠올려야 뜻이 또렷해집니다. 낮에 본 강물에도, 달 밝은 밤에 본 호수에도 쓸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지요.

‘여울’은 강이나 바다에서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을 가리킵니다. 윤슬이 물 위에 나타난 모습이라면, 여울은 물이 흐르는 자리입니다. “여울에 햇빛이 닿아 윤슬이 반짝였다”라고 쓰면 두 낱말의 자리가 한 장면 안에서 구별됩니다. 아이들에게 어휘를 설명할 때도 이런 문장 하나가 긴 뜻풀이보다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비슷하게 물과 관계된 말이라도 저마다 붙잡은 부분이 다릅니다. 물의 색을 말하는지, 흐름을 말하는지, 빛을 말하는지 한 번만 가려 보면 표현이 한층 정확해져요. 예쁜 말을 고른다는 것은 낯선 단어를 많이 넣는 일이 아니라, 눈앞의 장면에 꼭 맞는 말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천히 변하는 시간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노을’은 해가 뜨거나 질 무렵 하늘이 붉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흔히 저녁노을만 떠올리지만 아침노을도 있지요.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는 익숙한 문장과 “아침노을이 번졌다”는 문장을 나란히 놓으면, 이 말이 저녁에만 묶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의 부사입니다. “아이가 시나브로 자랐다”라고 하면 어느 하루에 갑자기 키가 컸다는 뜻이 아닙니다. 매일 보았기에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다가 문득 알아차린 순간까지 담기지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도 ‘모르는 사이’와 ‘조금씩’을 함께 짚습니다. 단순히 ‘천천히’로 바꾸면 속도는 남지만, 알아채지 못했다는 느낌은 옅어집니다.

교실에서 이 말을 알려 주고 며칠 뒤 글을 받아 보면 “시나브로 친해졌다”는 문장이 종종 나옵니다. 함께 보낸 날들이 쌓였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전해져요. 말뜻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낱말 카드보다 자신이 겪은 시간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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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마음을 담는 말

‘도란도란’은 여럿이 나직한 목소리로 정답게 이야기하는 소리나 모양을 나타냅니다. 도서관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모습과는 다르지요. 저녁 식탁에서 식구들이 하루 일을 주고받거나, 오랜 친구 둘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잇는 장면이 잘 어울립니다. “도란도란 이야기했다”라는 짧은 문장에 목소리의 크기와 사이의 온도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름으로도 자주 접하는 ‘다솜’은 사전에서 ‘애틋하게 사랑함’으로 풀이합니다. 국립국어원은 옛말 ‘오다’의 명사형인 ‘옴’을 현대 국어식으로 적은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금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사랑’과 똑같은 방식으로 아무 문장에나 끼워 넣기보다는, 그 말이 지닌 옛말의 자취까지 알고 쓰면 좋겠습니다. 낱말의 소리가 예뻐서 이름을 짓더라도 실제 뜻과 쓰임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도란도란이 함께 있는 자리의 분위기를 그린다면, 다솜은 마음의 깊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둘 다 따뜻하지만 가리키는 것은 같지 않아요. 비슷한 느낌의 말을 뜻까지 같은 말로 여기지 않는 습관이 어휘력을 키워 줍니다.

예쁜 풀이를 만났을 때 한 번 더 확인할 것

‘아람’은 밤이나 상수리 따위가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질 정도가 된 상태를 뜻합니다. “마음이 아람처럼 익었다”라고 비유할 수는 있겠지요. 다만 본래 뜻은 막연한 ‘성장’이 아니라 열매가 무르익은 상태에 닿아 있습니다. 비유가 아름다울수록 출발점인 실제 뜻을 놓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미리내’도 자주 소개되는 말입니다. 은하수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만 적힌 목록을 보았다면 한 줄을 더 읽어 볼 필요가 있어요.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은 이 말을 은하수의 제주 방언으로 싣고 있습니다. 순우리말이라는 말과 표준어라는 말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지역에서 살아온 말도 우리말의 소중한 일부이고, 그 말이 어디에서 쓰였는지 알면 아름다움이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학생에게 새 낱말을 건넬 때 저는 뜻 옆에 장면을 하나씩 붙입니다. 윤슬에는 빛이 닿은 강물을, 시나브로에는 어느새 작아진 작년 교복을 붙이는 식이지요. 그렇게 익힌 말은 시험이 끝난 뒤에도 남습니다. 예쁜 말은 소리만으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어느 순간과 만났을 때 비로소 자기 말이 됩니다.

뜻이 예쁜 순우리말은 왜 오래 기억될까요?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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