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실에서 사자성어 시험지를 걷다 보면 묘한 일이 있습니다. 전날 뜻을 줄줄 외우던 학생도 문장 속에 그 말을 넣으라고 하면 손을 멈춥니다. 네 글자는 기억나는데, 어떤 장면에서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사자성어 책을 고를 때 제가 수록 개수보다 설명 방식을 먼저 보는 이유입니다.
뜻보다 장면이 먼저 남습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매우 어려운 처지’라고만 외우면 뜻의 절반을 놓치기 쉽습니다. 항우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사방에서 고향인 초나라의 노래가 들렸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이 말에 담긴 고립감이 보입니다. 그래서 일이 조금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면초가라고 하면 어색합니다. 사방이 막히고 도와줄 사람도 없는 형편에 가까운 말이지요.
새옹지마(塞翁之馬)도 그렇습니다. 변방 노인의 말이 달아났다가 돌아오고, 그 뒤에도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는 뜻풀이보다 사건의 흐름을 기억한 학생이 이 말을 더 정확히 씁니다. 당장의 손해를 보고 곧바로 기뻐하라는 말이 아니라, 눈앞의 일만으로 앞날의 길흉을 단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니까요.
모든 사자성어에 이런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뜻을 글자와 함께 풀어 주는 편이 좋습니다. 국립국어원 자료에서도 사자성어와 고사성어의 구분이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책이 모든 표현에 극적인 유래를 억지로 붙이기보다, 확인되는 이야기와 글자에서 뜻을 읽는 설명을 구별하는지 살펴볼 만합니다.
책장을 펼치면 세 가지를 봅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는 차례보다 아무 쪽이나 두세 쪽 먼저 펼쳐 봅니다. 첫째, 한자가 장식처럼 실려 있지 않은지 봅니다. 과유불급의 ‘과(過)’가 지나침이고 ‘불급(不及)’이 미치지 못함이라는 풀이가 있으면, 네 글자의 짜임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자를 모두 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글자가 뜻을 맡고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 예문이 실제 쓰임을 보여 주는지 봅니다. ‘사면초가가 되었다’ 같은 짧은 문장만으로는 상황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팀 안팎에서 모두 반대해 제안을 도와줄 사람이 없자 사면초가에 놓였다’처럼 누가 왜 고립되었는지 드러나야 합니다. 학생에게는 낯선 역사 이야기 한 편보다 자기 생활에 닿는 예문 한 줄이 더 오래 남기도 합니다.
셋째, 비슷한 말을 어떻게 가르는지 봅니다. 사면초가는 주변에 도움을 구하기 어려운 처지에, 진퇴양난은 앞으로 나아가거나 뒤로 물러서기도 어려운 처지에 초점이 있습니다. 둘 다 난처할 때 쓰지만 같은 장면을 가리키지는 않지요. 이런 차이를 짚어 주는 책은 뜻풀이를 외운 뒤에도 다시 펼칠 이유가 생깁니다. 표기나 한자가 책마다 다르게 보일 때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와 풀이를 확인하는 습관도 유용합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좋은 책이 달라집니다
초등학생의 첫 사자성어 책이라면 한 쪽에 너무 많은 표현을 밀어 넣지 않은 편이 좋습니다. 그림이나 짧은 이야기를 읽고 ‘이 말은 언제 쓸까?’를 말로 설명할 수 있으면 충분합니다. 뜻풀이를 가리고 장면만 보여 준 뒤 어울리는 말을 골라 보는 활동도 좋습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하루에 몇 개를 외웠는지가 아니라, 낯선 표현을 자기 말과 이어 보는 경험입니다.
중학생이라면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는 책이 필요합니다. 글자 풀이, 비슷한 표현과의 차이, 문장 속 예문이 함께 있어야 독해에 보탬이 됩니다. 가령 ‘과유불급’이 나온 글에서 무엇이 지나쳤는지 찾고, 그 문장을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로 바꿔 읽어 보는 식입니다. 시험을 준비한다면 문제 수보다 오답 설명을 먼저 확인합니다. 왜 다른 표현은 그 문맥에 맞지 않는지 설명해 주는 책이 학습에 더 쓸모 있습니다.
성인 독자는 분량보다 찾아보기 쉬운 구성을 우선해도 좋습니다. 신문이나 책에서 만난 표현을 그때그때 확인하려면 가나다순 색인과 분명한 뜻풀이가 편합니다. 특히 글에 직접 쓰려는 사람이라면 예문이 풍부하고 사용 범위를 지나치게 넓히지 않는 책을 권합니다. 아는 말을 늘리는 일과 자연스럽게 쓰는 일 사이에는 생각보다 거리가 있습니다.
한 권을 끝내는 방법보다 한 말을 써 보는 방법
저는 학생에게 새 표현을 배운 날 곧바로 네 글자를 열 번 쓰게 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말이 나온 장면을 한 문장으로 말하게 하고, 다음에는 자기 경험에 닿는 장면을 하나 떠올리게 합니다. 그 표현을 쓰면 어색한 경우도 찾아봅니다. 사면초가를 배웠다면 ‘숙제가 많다’와 ‘의견을 낼 때마다 모두에게 반대당한다’를 비교하는 식입니다. 두 상황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으면 뜻을 제법 자기 것으로 만든 셈입니다.
며칠 뒤에는 뜻을 다시 읽기 전에 표현을 문장 속에서 만나게 합니다. 기억이 흐릿해졌다면 이야기나 한자 풀이로 돌아가면 됩니다. 책 한 권의 마지막 쪽까지 빨리 가는 것보다, 읽다가 만난 한 표현을 적절한 자리에서 알아보고 쓰는 일이 오래 남습니다. 사자성어 책도 그 장면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책이 곁에 두기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