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우리말 모음, 뜻을 알면 더 오래 기억될까요?

1회
순우리말 모음, 뜻을 알면 더 오래 기억될까요?

얼마 전 수업에서 아이들에게 강물 사진을 보여 주며 반짝이는 물결을 뭐라고 부를지 물었습니다. ‘물빛’이라는 답이 먼저 나왔고, ‘윤슬’을 들려주자 몇몇 아이가 바로 공책에 적더군요. 예쁜 소리라서 기억할 수도 있겠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장면을 알고 나면 훨씬 오래 남습니다. 순우리말 모음을 만들 때도 저는 낱말을 길게 늘어놓기보다 눈앞에 그려지는 장면끼리 묶어 둡니다.

물가에서 만나는 말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입니다. 강 전체의 빛깔이 아니라, 물결 위에서 잘게 움직이는 반짝임을 떠올리면 됩니다. ‘저녁 강에 윤슬이 번졌다’라고 쓰면 해가 비친 곳과 물결의 움직임이 함께 보이지요. 다만 윤슬을 ‘윤’과 ‘슬’로 나누어 한자 뜻을 붙이는 풀이가 떠돌기도 합니다. 확인되지 않은 어원을 뜻풀이처럼 외우기보다는, 실제로 가리키는 모습을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가람은 강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강이라는 말이 틀리거나 반드시 가람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을 건넜다’는 일상적인 문장이고, ‘가람 건너 마을’은 글의 분위기를 조금 다르게 만듭니다. 말맛을 고를 수 있는 어휘 하나가 늘어나는 셈이지요.

여울과 나루도 물가에 있지만 가리키는 대상이 다릅니다. 여울은 물이 얕거나 강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곳이고, 나루는 배가 건너다니던 곳입니다. ‘여울에서 물소리가 커졌다’와 ‘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다’를 나란히 읽으면 장소의 차이가 선명합니다. 강가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릴 때 놓치던 풍경이 보입니다.

비의 굵기와 오는 모양을 나누면

비를 가리키는 말은 날씨를 기록할 때 특히 쓸모가 있습니다. 가랑비는 가늘게 내리는 비입니다. 바깥에 나갈 때는 별일 아닌 듯해도 오래 맞으면 옷이 젖습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작은 일이 거듭되면 큰 결과를 낳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까닭도 그 장면에 있습니다.

보슬비는 바람 없이 보슬보슬 조용히 내리는 비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랑비가 빗줄기의 가늘기에 눈길을 둔다면, 보슬비는 내리는 느낌까지 전합니다. 두 말이 만나는 장면도 있지만 문장에서 강조하는 모습은 조금 다릅니다. 반대로 장대비는 장대처럼 굵고 세차게 쏟아지는 비입니다. ‘비가 왔다’보다 ‘장대비가 쏟아졌다’가 우산을 써도 소용없던 상황을 더 빨리 전하지요.

여우비는 햇빛이 비치면서 내리는 비입니다. 여기서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여우비를 그저 ‘잠깐 내리는 비’라고만 외우면 흐린 날 잠시 흩뿌리는 비까지 여우비라고 부르기 쉽습니다. 국립국어원 한국어기초사전의 뜻풀이에도 햇빛이 비치는 상황이 들어갑니다. 창밖이 환한데 빗방울이 떨어지는 뜻밖의 장면을 함께 기억하면 구별이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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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움직임을 담은 말

그루잠은 잠에서 깨었다가 다시 든 잠입니다. 주말 아침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든 뒤 늦게 일어났다면 그 사이에 잔 잠을 그루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늦잠을 잔 것과는 순서가 다르지요. 낱말 뜻을 외울 때 ‘잠들었다, 깼다, 다시 잠들었다’는 세 장면을 그려 보면 기억하기 쉽습니다.

마중물은 펌프에서 물을 끌어올리려고 먼저 붓는 물입니다. 손잡이를 아무리 움직여도 물이 나오지 않을 때 위에서 한 바가지 부어 주던 장면에서 나온 말이지요. 지금은 어떤 일이 시작되도록 돕는 작은 계기를 비유할 때도 씁니다. ‘첫 기부가 모금의 마중물이 됐다’라는 문장에는 적은 물이 다른 물을 끌어올린다는 본래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시나브로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뜻의 부사입니다. ‘실력이 시나브로 늘었다’라고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매일의 연습이 쌓이는 동안 변화를 뚜렷이 느끼지 못했다는 뜻이 됩니다. 빠르게 달라진 일을 말하면서 시나브로를 붙이면 낱말의 속도와 문장의 상황이 어긋납니다. 예쁜 말인지보다 그 말이 움직이는 시간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순우리말을 문장 속에서 쓰려면

수업에서 낱말 열 개를 한꺼번에 외운 학생보다 한 낱말을 자기 문장에 넣어 본 학생이 오래 기억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순우리말 모음도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물가에 갔다면 윤슬과 여울 가운데 실제로 본 것이 무엇인지 고르고, 비 오는 날에는 햇빛이 있었는지부터 살펴 여우비라는 말을 쓸지 판단하는 식입니다.

또 순우리말이라고 해서 모든 자리에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친구에게 길을 알려 줄 때는 ‘강 건너편’이 ‘가람 건너편’보다 빠르게 통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물가를 천천히 묘사하는 글이라면 가람이나 윤슬이 장면을 더 또렷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말의 출신보다 뜻과 쓰임이 문장에 맞는지가 중요합니다.

사전을 볼 때는 뜻풀이 한 줄에서 멈추지 않고 예문과 품사도 함께 읽어 보곤 합니다. ‘시나브로’가 명사가 아닌 부사라는 사실을 알면 ‘시나브로가 아름답다’처럼 이름처럼 쓰기보다 ‘시나브로 달라졌다’처럼 움직임을 꾸미는 자리를 찾게 됩니다. 한 단어를 제대로 쓰게 되는 순간, 목록에 있던 말이 비로소 자기 어휘가 됩니다.

순우리말 모음, 뜻을 알면 더 오래 기억될까요? -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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