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가시리 들판을 걷는데, 바람이 먼저 지나가고 억새가 한 박자 늦게 몸을 기울였다. 멀리서 보면 온통 은빛일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는 줄기마다 갈색과 연한 금색이 섞여 있었다. 사진을 찍으러 잠깐 멈췄다가, 그 색이 계속 달라지는 게 좋아 한동안 서 있었다.
제주도 억새 명소를 찾으면 이름난 오름이 먼저 나온다. 가시리에도 억새로 알려진 따라비오름이 있다. 그런데 제가 오래 기억하는 풍경은 정상의 넓은 전망보다 그곳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멀어지고, 들판 옆으로 난 길에 발소리만 남는 순간이 있었다.
가시리에서는 억새보다 길이 먼저 보였다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는 바다에서 조금 들어간 중산간 마을이다. 조랑말체험공원 쪽으로 가면 주변이 넓게 트이고,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이 들판 너머로 보인다. 길을 잡을 때는 조랑말체험공원을 기준으로 삼는 편이 편했다. 마을 안 좁은 길로 무작정 들어가기보다 걷기 시작할 곳을 정하고 움직이니 한결 차분했다.
이 일대를 잇는 쫄븐갑마장길은 약 10.3킬로미터다. 비짓제주에도 따라비오름과 큰사슴이오름을 지나는 길로 소개돼 있다. 이름에 ‘짧은’이라는 뜻이 담겨 있지만, 가볍게 한 바퀴 돌 거리로 생각하면 길게 느껴질 수 있다. 저는 전 구간을 채우려 애쓰지 않고 들판과 오름 주변에서 걸음을 늦췄다. 한적한 곳을 좋아한다면 얼마나 멀리 갔는지보다 돌아올 여력을 남겨두는 쪽이 좋았다.
길가의 억새는 한곳에 빽빽하게 서 있기보다 풀밭과 돌담 사이로 이어졌다. 그래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풍경이 조금씩 달랐다. 낮은 곳에서는 줄기의 거친 질감이 보이고, 시선을 들면 바람이 지나간 자리가 들판 전체에 번졌다. 큰 포토존 하나를 찾아가는 기분과는 달랐다.
따라비오름에 오르며 사람이 드문 시간을 만났다
따라비오름 쪽은 가시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억새 풍경이다. 능선에 오르면 억새 너머로 주변 오름과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가 걸은 날에도 오름 입구에서는 다른 여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니 이곳을 언제나 사람 없는 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각자 걷는 속도가 달라 조금 지나자 앞뒤 간격이 벌어졌고, 잠시 바람 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오르는 길에서는 발밑을 자주 봤다. 흙길과 계단을 지나며 풍경이 열리는데, 억새를 보느라 걸음을 서두르면 길이 고르지 않은 곳을 놓치기 쉽다. 바람도 아래 들판보다 능선에서 훨씬 또렷했다. 얇은 겉옷 하나가 있으면 오래 서 있기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은 시간에 따라 표정이 달랐다. 해가 높을 때는 억새 줄기와 오름의 굴곡이 선명했고, 오후로 갈수록 꽃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렇다고 노을 시간만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저는 오히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지나간 뒤, 길옆에 서서 억새가 다시 흔들리는 모습을 볼 때가 좋았다.
큰사슴이오름 쪽에서는 마을의 넓이가 느껴졌다
큰사슴이오름은 대록산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따라비오름의 둥근 능선과 달리, 이쪽을 바라볼 때는 초지와 완만하게 이어지는 산자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같은 가시리 안에서도 보는 방향을 바꾸니 억새의 느낌이 달랐다. 한곳에서 사진을 많이 남기기보다 두 오름 사이의 들판을 천천히 걷고 싶어진 이유다.
가시리 길에는 말과 목장의 흔적도 남아 있다. 억새만 떼어 놓고 보면 가을 풍경이지만, 들판과 길을 함께 보면 누군가 오래 오가며 살아온 마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저는 길을 걸을 때 목장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거나 억새 사이에 새 발자국을 내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풀밭이 모두 산책로는 아니었다.
길게 걷지 않아도 좋았던 한나절
가시리에서 억새를 보려면 걸을 거리부터 정하는 게 좋다. 쫄븐갑마장길 전체를 걸으면 시간이 제법 필요하다. 짧게 머물 날이라면 조랑말체험공원 주변에서 길을 살피고, 따라비오름이나 큰사슴이오름 가운데 한쪽에 시간을 쓰는 편이 여유롭다. 돌아오는 길까지 생각해 물과 편한 신발을 챙기면 좋다. 바람이 강하거나 비가 온 날에는 능선보다 안전한 길을 고르는 게 마음도 편하다.
- 위치는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일대다. 길 찾기는 조랑말체험공원과 오름 이름을 기준으로 했다.
- 억새는 가을에 눈에 띄지만 해마다 자라는 모습과 빛깔이 다르다. 방문 직전 탐방 안내와 날씨를 확인하는 편이 좋다.
- 사람 수는 요일과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제가 걸은 날의 조용함을 늘 기대할 수는 없다.
돌아오는 길에는 억새 사진보다 바람이 멎었을 때의 들판이 더 오래 떠올랐다. 잠시 고요해졌다가 다시 움직이는 풀을 보고 있자니, 제주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게 꼭 많은 곳을 돌아보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시리에서는 그 한 장면을 볼 만큼 천천히 걸은 시간이 좋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