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국에서 녹용을 보여 주시며 “기운도 없고 예전 같지 않은데, 남자한테 좋다는 말이 맞나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먼저 무엇이 가장 불편한지 여쭙습니다. 피곤한 것인지, 운동할 때 힘이 달리는 것인지, 성기능에 변화가 생긴 것인지에 따라 확인할 문제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녹용은 자라는 사슴뿔을 가공한 원료입니다. 오래전부터 보양 목적으로 사용해 왔지만, 전통적으로 쓰였다는 사실과 남성에게 특정 효능이 확인됐다는 말은 구분해야 합니다. 특히 ‘테스토스테론을 올린다’거나 ‘발기부전을 개선한다’는 광고 문구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와 대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성의 성기능과 호르몬에 효과가 확인됐을까요?
녹용을 먹으면 남성호르몬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45~65세 남성 32명이 참여한 12주 연구에서는 녹용을 먹은 집단과 가짜 약을 먹은 집단 사이에 성기능의 뚜렷한 차이가 없었습니다. 혈액검사에서 성호르몬 수치의 유의한 변화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 연구 내용은 미국 국립의학도서관의 논문 정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32명은 적은 인원이고, 연구 참여자도 성기능 장애를 진단받은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결과 하나로 모든 상황에서 효과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근거만으로 녹용이 발기부전을 치료하거나 테스토스테론을 높인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녹용 임상시험 7건을 검토한 연구에서도 전반적인 효능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설득력 있는 사람 대상 근거는 부족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동물실험에서 호르몬이나 생식 관련 지표가 좋아졌다는 결과를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실험동물에게 준 성분과 양, 사람 몸에서의 흡수와 반응은 다릅니다. 동물실험은 연구를 이어 갈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약국에서 손님께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다’고 설명할 근거로 쓰기는 어렵습니다.
피로와 운동 능력에도 기대해도 될까요?
남성분들이 말하는 ‘기력’에는 여러 뜻이 섞여 있습니다. 야근 뒤의 피로, 수면 부족, 운동할 때의 체력 저하가 같은 문제는 아니지요. 미국 국립보건원 영양제정보실은 녹용의 운동 능력 관련 임상시험을 검토한 뒤, 근력이나 지구력 향상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거의 없다고 설명합니다. 운동하는 남성 38명이 참여한 한 연구에서도 녹용 추출물이나 분말을 먹은 집단이 가짜 약 집단보다 뚜렷하게 나은 결과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피로에 관한 연구는 원료의 가공 방법과 연구 대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최근 특정 녹용 추출물을 만성 피로가 있는 성인에게 시험한 연구에서 일부 피로 지표가 개선됐다는 보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를 시중의 모든 녹용 제품이나 건강한 남성의 ‘활력 증가’로 넓혀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원료를 누구에게 얼마나 오래 사용했는지가 빠지면 숫자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피로가 몇 주씩 이어진다면 보양식 선택보다 원인을 먼저 살피는 편이 낫습니다. 잠을 충분히 자는지, 식사를 거르지는 않는지부터 확인하고, 체중 변화나 숨참 같은 증상이 함께 있는지도 보셔야 합니다. 성기능 변화가 계속된다면 당뇨병, 혈관 질환, 복용 중인 약 등이 관련될 수 있어 진료가 필요합니다. 녹용을 드시며 이런 신호를 오래 미루는 일은 피했으면 합니다.
하루에 얼마나 먹고, 약과 함께 먹어도 될까요?
녹용에는 모든 성인 남성에게 적용할 수 있는 ‘하루 권장량’이 확립돼 있지 않습니다. 연구에서 쓴 양을 그대로 가져와 안전한 섭취량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분말인지 추출물인지에 따라 농도가 다르고, 녹용 외에 홍삼·비타민·카페인 같은 성분이 함께 들어간 제품도 있기 때문입니다. 제품을 고를 때는 앞면의 큰 광고 문구보다 원재료명, 1회 섭취량, 하루 섭취 횟수와 주의사항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녹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제품이 건강기능식품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일반식품과 건강기능식품은 표시와 관리 기준이 다르며, 건강기능식품이라도 표시된 기능성이 곧 발기부전 치료 효과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안내하는 제품 정보와 포장의 기능성 표시를 함께 확인하면 광고와 실제 표시 내용의 차이를 찾기 쉽습니다.
함께 먹으면 절대 안 되는 약의 목록이 녹용에 대해 충분히 확립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알려진 상호작용이 없다’는 말을 ‘같이 먹어도 안전하다’로 바꾸면 곤란합니다. 특히 와파린 같은 항응고제나 항혈소판제, 당뇨병 치료제처럼 복용 상태를 세심하게 관리해야 하는 약을 드신다면, 녹용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입증됐다고 단정하지 말고 처방의나 약사에게 제품 전체 성분을 보여 주고 상담하세요. 다른 건강기능식품이나 한약을 이미 드시고 있다면 그것도 함께 알려주셔야 합니다.
전립선암 등 호르몬과 관련된 질환으로 치료 중인 분, 수술을 앞둔 분도 복용 전에 담당 의료진과 상의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녹용 자체의 장기 안전성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제품마다 들어 있는 성분도 다릅니다. 복용 뒤 발진, 심한 속 불편함 등 평소와 다른 증상이 생기면 섭취를 멈추고 상담받으세요.
약국에서는 무엇부터 확인할까요?
제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제품 이름보다 복용 목적과 현재 드시는 약입니다. 예를 들어 ‘기운이 없어서’ 산 녹용 농축액에 카페인이 함께 들어 있다면, 잠이 부족한 분에게는 저녁 복용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 제품에 같은 비타민이나 미네랄이 겹쳐 들어 있을 수 있으니, 녹용 함량만 보지 말고 전체 성분과 하루 섭취량을 합쳐 봐야 합니다. 이런 점검은 녹용의 효능 판단과 별개로 필요한 일입니다.
남성 건강을 위해 녹용을 찾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다만 지금의 사람 대상 연구로는 성기능이나 남성호르몬 개선을 자신 있게 약속하기 어렵습니다. 몸의 변화가 계속된다면 녹용을 얼마나 먹을지보다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확인하는 일이 먼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