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번 제주행 비행기표를 끊을 때는 가고 싶은 곳보다 걷고 싶은 시간이 먼저 떠올랐다. 바다를 보되 사람들 사이에서 사진 찍을 자리를 찾느라 바쁘지 않은 곳. 그래서 숙소를 정하기 전에 지도에서 동쪽 해안의 작은 마을들을 오래 들여다봤다. 내가 걸어본 곳 가운데 다시 가고 싶었던 하도리가 눈에 남았다.
제주를 갈 때마다 유명한 장소를 하나도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 건 아니다. 다만 이번에는 비행기표 한 장으로 멀리 왔다는 생각 때문에 일정을 빽빽하게 채우고 싶지 않았다. 이틀 밤을 머물며 마을길과 바닷길을 걷는 것으로도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비행기표를 고를 때 남겨둔 시간
표를 찾을 때 가장 싼 숫자만 보지는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어두워지는 편을 타면 낯선 동네에 들어가는 첫날이 너무 짧다. 반대로 돌아오는 날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하면 마지막 산책을 포기해야 한다. 이번에는 제주에 낮 동안 도착하고, 돌아오는 날에도 아침을 먹은 뒤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골랐다.
물론 출발 시간 하나 바꾸면 가격이 달라졌다. 내가 찾던 날에도 선택지 사이에 몇만 원 차이가 있었다. 그 차이를 아끼고 싶어 여러 번 화면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결국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표를 샀다. 여행을 다녀온 뒤 기억에 남은 건 결제 금액보다 돌아오는 날 숙소 앞길을 한 번 더 걸었던 시간이었다.
짐도 작게 꾸렸다. 걸을 여행이라 신발 한 켤레와 얇은 겉옷을 먼저 넣고, 빈 공간은 그대로 두었다. 표를 예약하기 전에는 수하물 조건을 확인했다. 화면에 처음 보이는 금액만 보고 고르면 필요한 짐을 추가할 때 예상했던 비용과 달라질 수 있어서다. 이런 확인은 들뜨지 않는 일 같지만, 출발하는 날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공항에서 하도리까지는 서두르지 않았다
제주에 도착해서 바로 바다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공항을 나와 물을 사고, 이동 경로를 다시 확인한 뒤 천천히 동쪽으로 향했다. 차창 밖 풍경이 시내 건물에서 낮은 집과 밭으로 바뀌는 동안, 여행을 시작했다는 기분이 조금씩 났다. 하도리에 닿았을 때는 숙소에 짐을 놓고 걷기 좋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동 방법은 출발하는 곳과 머무는 숙소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나도 길을 찾을 때 마을 이름만 입력했다가 숙소까지 남은 거리를 보고 경로를 다시 살폈다. 하도리 안에서도 바닷가 쪽과 안쪽 마을길의 분위기는 꽤 다르다. 예약한 숙소의 정확한 위치를 기준으로 마지막 이동 구간을 확인하는 편이 좋다.
처음 걷기 시작한 길에서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담장 너머 작은 마당을 보고, 밭 사이로 난 길에서 바람을 맞았다. 집 가까이를 지날 때는 목소리를 낮췄다. 여행자에게는 예쁜 골목이어도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보내는 집 앞이다. 그 생각을 하고 나니 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바닷가보다 오래 기억난 마을길
하도리 해안에 섰을 때 바다는 생각보다 차분해 보였다. 하지만 조금만 걸으면 바람 소리가 커졌고, 파도가 닿는 자리마다 물빛도 달랐다. 나는 바닷가에서 한동안 서 있다가 다시 집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진으로 남기기 좋은 장면보다 그 사이를 오가던 시간이 좋았다.
특히 좋았던 건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점이다. 걷다가 앉아 신발에 들어온 모래를 털고, 다시 골목 끝을 향해 갔다. 한 번은 같은 길을 되돌아왔는데도 처음에는 보지 못한 낮은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곳을 여러 군데 찍고 이동할 때는 지나쳤을 풍경이었다.
그렇다고 늘 고요한 마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걸었던 시간에는 몇 사람만 마주쳤지만, 날씨와 요일에 따라 바닷가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한적함을 기대하고 간다면 유명한 장소의 빈 시간을 찾기보다, 같은 길을 느긋하게 다시 걸을 여유를 두는 게 더 잘 맞는다. 사람을 피하는 데 집중하면 동네의 소리까지 놓치기 쉽다.
돌아오는 비행기표에 맞춰 걷던 아침
돌아오는 날에는 알람을 일찍 맞췄다. 비행기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서 숙소 근처를 한 바퀴 돌고 싶었다. 전날 걸었던 길인데 아침에는 빛이 달랐다. 바다 쪽으로 더 멀리 갈까 잠깐 망설이다가, 공항으로 이동할 시간을 생각해 골목 어귀에서 돌아섰다. 아쉬움이 조금 남는 정도가 내게는 알맞았다.
이번 여행에서 비행기표는 멀리 가기 위한 수단이면서, 어디까지 걷고 언제 돌아설지를 정해주는 약속이기도 했다. 다음에 표를 살 때도 먼저 이름난 장소를 몇 군데 갈 수 있는지 세지는 않을 것 같다. 낯선 동네에서 천천히 걸을 하루가 남는지부터 볼 것이다. 하도리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풍경도 바다 한 장면이 아니라, 숙소로 돌아가던 평범한 골목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