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계부를 오래 쓰다 보니 연말정산이 가까워질 때 퇴직연금을 급하게 챙기는 집을 자주 보게 됩니다. 세액공제 한도를 채우려고 큰돈을 한꺼번에 넣으면, 다음 달 카드값이나 생활비가 빠듯해지기도 하죠. 노후를 위한 돈도 결국 매달의 살림 안에서 나와야 오래 이어집니다.
1. 내 퇴직연금이 어떤 유형인지 확인하기
회사에서 퇴직연금에 가입했다면 먼저 DB형인지 DC형인지 확인합니다. 고용노동부 안내에 따르면 DB형은 퇴직할 때 받을 급여가 미리 정해지고 회사가 적립금을 운용합니다. DC형은 회사가 낼 부담금이 정해져 있고, 근로자가 적립금을 운용합니다. 개인형 퇴직연금인 IRP는 이직하거나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급여를 모을 수 있고, 재직 중에도 개인이 추가로 납입할 수 있는 계좌입니다.
가계부에서는 이 차이가 꽤 중요합니다. 회사가 내는 퇴직연금 부담금은 우리 집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생활비가 아닙니다. 반면 IRP나 DC형에 내가 추가로 넣는 돈은 매달 쓸 수 있는 현금을 줄입니다. 퇴직연금 잔액이 늘어나는 것과 이번 달 생활비가 넉넉한 것은 별개의 이야기예요.
2. 납입액은 세액공제 한도보다 생활비를 보고 정하기
연금계좌 세액공제 대상 납입액은 연금저축을 포함해 연 900만 원까지입니다. 연금저축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금액은 연 600만 원까지이고요. 하지만 900만 원은 누구나 채워야 하는 목표 금액이 아닙니다. 한 달로 나누면 75만 원입니다. 월급에서 75만 원을 빼고도 주거비, 식비, 보험료, 비상지출을 감당할 수 있는지 먼저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매달 고정비와 생활비를 내고 35만 원이 남는 집이라면, 비상금 20만 원과 퇴직연금 추가 납입 10만 원, 자유롭게 쓸 돈 5만 원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월 10만 원은 1년에 120만 원입니다. 다른 연금계좌 납입액이 없고 세액공제 요건을 충족한다면, 총급여 5,500만 원 이하 근로자는 지방소득세를 포함한 공제율 16.5% 기준으로 최대 19만 8천 원의 세액공제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실제 공제액은 본인의 세금과 다른 공제 항목에 따라 달라집니다.
근데 숫자보다 더 중요한 건 그 10만 원을 넣고도 생활이 편안한지입니다. 비상금이 거의 없거나 카드값을 다음 달 월급으로 막고 있다면, 납입액을 늘리는 순서를 늦춰도 됩니다. 절세를 위해 넣은 돈을 생활비 때문에 다시 꺼내야 한다면 가계에는 부담이 더 커질 수 있으니까요.
3. 넣은 뒤에는 잔액과 운용 상태를 함께 보기
DC형과 IRP는 돈을 넣은 뒤 어떻게 운용되는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계좌 잔액만 보고 있으면 새로 넣은 돈이 늘어난 것인지, 운용 결과로 늘어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가계부에 ‘이번 달 추가 납입액’과 ‘분기 말 평가금액’을 따로 적는 방식이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매일 가격을 확인할 필요는 없지만, 몇 달에 한 번은 자금이 어느 상품에 들어 있는지 볼 만합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DC형과 IRP에는 운용 지시가 없을 때 미리 정한 방법으로 운용하는 디폴트옵션이 있습니다. 이름에 ‘자동’이 들어간다고 모든 상품이 원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리금 보장 여부, 손실 가능성, 수수료를 확인하고 내 성향에 맞는지 판단해야 합니다. 금융감독원과 고용노동부의 비교 공시에서는 금융회사별 수익률과 연간 총비용 부담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수익률만 보고 상품을 고르면 앞으로의 결과까지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4. 급하게 쓸 돈과 오래 둘 돈을 구분하기
퇴직연금은 가까운 시일에 쓸 여행비나 이사비를 담아 두는 통장과 성격이 다릅니다. IRP에서 세액공제를 받은 납입액과 운용수익을 연금 외 방식으로 찾으면 과세가 생길 수 있고, 중도인출에도 법에서 정한 요건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납입 전에 6개월 안에 예정된 큰 지출부터 가계부에 적어 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가령 4개월 뒤 이사비 200만 원이 필요하다면 매달 50만 원씩 마련해야 합니다. 그 돈까지 퇴직연금에 넣고 세액공제 예상액만 계산하면 당장의 현금 부족을 놓치기 쉽습니다. 반대로 비상금과 예정 지출이 이미 준비돼 있다면, 월 5만 원이나 10만 원의 자동 납입도 충분히 의미 있는 습관이 됩니다.
저는 퇴직연금을 챙길 때 ‘얼마나 많이 넣었나’보다 ‘다음 달에도 무리 없이 넣을 수 있나’를 먼저 봅니다. 생활을 너무 조이지 않는 금액을 정하고, 형편이 나아질 때 조금씩 올리는 편이 오래 가더라고요. 노후 준비도 오늘의 가계가 버틸 수 있는 속도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