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래된 드라마를 떠올릴 때 저는 줄거리보다 먼저 음악이 생각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1994년 MBC 드라마 ‘서울의 달’도 그렇습니다. 달동네를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얼굴보다 장철웅의 목소리가 먼저 들리죠. 서울의 달 드라마 ost를 다시 들으면, 이 작품이 왜 낯선 도시에서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남았는지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이 글에는 주요 반전이나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서울, 이곳은’이 오래 남는 이유
가장 먼저 들을 곡은 장철웅의 ‘서울, 이곳은’입니다. OST 앨범에는 ‘우정의 Theme’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친구 사이를 따뜻하게 감싸는 노래를 예상하기 쉽지만, 실제로 들으면 낯선 곳에 섞이려 애쓰는 사람의 쓸쓸함이 먼저 다가옵니다. 도시의 화려함을 노래하면서도 그 안에 선 사람이 편안해 보이지 않는 묘한 균형이 있거든요.
드라마에서는 한석규가 연기한 홍식과 최민식이 연기한 춘섭이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함께 지냅니다. 둘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울을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홍식은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어 하고, 춘섭은 자신이 지킬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찾으려 합니다. ‘서울, 이곳은’을 우정의 노래로만 듣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친구가 곁에 있어도 각자의 불안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으니까요.
흥미로운 건 이 곡이 나중에 ‘응답하라 1994’에서 로이킴의 목소리로 다시 불렸다는 점입니다. 로이킴 버전으로 먼저 알았다면 장철웅의 원곡을 이어서 들어보는 편이 좋습니다. 같은 노래여도 원곡의 거친 목소리는 ‘서울의 달’ 속 인물들이 하루를 버티는 감각과 더 가깝게 들립니다. 어느 쪽이 더 낫다는 평가보다, 노래가 놓인 드라마의 풍경이 감상을 얼마나 바꾸는지 느끼게 됩니다.
제목이 같은 곡도 두 가지 방식으로 들린다
벅스에 실린 ‘서울의 달’ OST는 1994년 6월 발매된 9곡짜리 앨범입니다. 첫 곡은 ‘서울의 달’ 경음악이고, 다섯 번째 곡은 장철웅이 노래한 ‘서울의 달’입니다. 같은 제목의 연주곡과 노래를 차례로 들으면 악기가 먼저 그려놓은 거리 위로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서는 느낌이 납니다. OST를 한 곡만 골라 듣기보다 앨범 순서대로 들어볼 만한 이유입니다.
‘서울의 달’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면 김건모의 동명곡도 함께 나올 수 있습니다. 드라마 음악을 찾는다면 가수 장철웅, 앨범명 ‘서울의 달 (MBC 드라마)’를 확인하면 헷갈리지 않습니다. 대표곡 ‘서울, 이곳은’ 역시 드라마 제목과 곡 제목이 다르니 둘 다 검색해보는 게 좋습니다. 제목만 기억했다가 원하던 노래를 못 찾는 일이 의외로 잦습니다.
이 앨범은 재생 시간이 약 30분입니다. 요즘 드라마 OST처럼 여러 가수의 신곡이 길게 이어지는 구성과는 다릅니다. 한 사람의 목소리와 몇 가지 주제가가 반복되며 드라마의 분위기를 붙잡습니다. 그래서 전체를 듣고 나면 개별 곡보다 ‘서울의 달’이라는 작품의 온도가 남습니다.
사랑과 후회의 장면에는 다른 곡이 있다
‘서울, 이곳은’이 도시와 우정의 거리감을 떠올리게 한다면, ‘그때는 왜’는 가까운 사람에게 늦게 마음이 닿는 감정을 건드립니다. 앨범에는 ‘사랑의 Theme’로 표기되어 있고 경음악 버전도 따로 실려 있습니다. 노래를 먼저 듣고 연주곡을 이어 들으면 가사가 설명하던 감정이 잠시 물러나고, 그 자리에 장면을 떠올릴 여백이 생깁니다.
‘체념’에는 ‘슬픔의 Theme’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다만 곡 제목만 보고 특정 인물의 운명이나 장면을 미리 짐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감정을 단번에 판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누군가의 선택이 답답하다가도, 그 사람이 살아온 형편을 보고 나면 쉽게 미워할 수 없죠. 음악도 그런 복잡한 마음을 한층 오래 붙들어둡니다.
처음부터 앨범 전곡을 듣기 부담스럽다면 ‘서울, 이곳은’, ‘그때는 왜’, 제목곡 ‘서울의 달’ 순서로 세 곡만 들어도 좋습니다. 각각 도시, 관계,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조금씩 다르게 보여줍니다. 마음에 드는 곡이 생기면 그때 경음악 버전과 ‘반성’, ‘내가 알고 있는 사랑’까지 넓혀가면 됩니다.
드라마를 볼 사람과 음악만 들을 사람에게
‘서울의 달’은 빠른 전개나 매회 뚜렷한 사건을 원하는 사람보다 인물이 살아가는 시간을 천천히 지켜보는 사람에게 맞습니다. MBC가 소개한 이 작품은 81부작입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긴 호흡이지만, 그만큼 홍식과 춘섭의 관계가 달라지는 작은 순간들이 쌓입니다. 1990년대 서울의 생활감과 배우들의 젊은 시절 연기를 보고 싶다면 첫 몇 회를 본 뒤 이 드라마의 속도가 자신에게 맞는지 판단해도 늦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당장 시작할 시간이 없다면 OST만 들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습니다. 다만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면 화면 속 달동네를 한 번쯤 찾아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서울, 이곳은’은 단순한 추억의 노래보다 넓어집니다. 누구에게는 기회의 도시이고 누구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장소였던 서울의 표정을, 장철웅의 목소리가 여전히 잘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