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다가구주택 경매 현장에서 만난 세입자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월세는 밀린 적이 없었고 계약서도 잘 보관하고 있었죠. 그런데 보증금을 언제 돌려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같은 건물의 다른 세입자 보증금과 먼저 설정된 담보권을 함께 따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월세 계약서는 월세 5만 원을 깎는 문제보다, 나중에 내 보증금이 어디에 놓이는지 확인하는 문서입니다.
서명하기 전에는 집주인과 집부터 맞춰본다
계약서 맨 위의 임대인 이름을 등기사항증명서의 소유자와 대조합니다. 주소도 건물 이름만 보지 말고 동·층·호수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현관문에는 302호라고 붙어 있는데 계약서에는 301호라고 적힌 식의 오류는 현장에서 바로 고치는 게 낫습니다. 다가구주택이라면 내가 빌리는 부분이 어느 층 어느 호실인지 계약서에 분명히 적어두는 편이 안전합니다.
대리인이 나왔다면 ‘가족이 대신 왔다’는 말로 끝내지 않습니다. 위임장과 인감 관련 서류, 대리인의 신분을 확인하고 보증금을 받을 계좌도 누구 명의인지 확인합니다. 신탁등기가 보이는 집은 더 조심합니다. 등기부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임대차계약을 맺을 권한까지 갖는지 신탁원부와 필요한 동의 절차를 따져야 합니다. 설명이 흐릿하면 계약금을 보내기 전에 멈추는 게 맞습니다.
등기부는 계약 당일 한 번, 잔금 보내기 직전에 한 번 더 봅니다. 그 사이에 근저당이나 가압류가 새로 붙을 수 있으니까요. 다가구는 등기부만으로 다른 호실 세입자의 보증금이 모두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선순위 임대차 정보와 세금 체납 정보를 임대인에게 요청하고, 받은 자료를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의 내용과 맞춰봅니다. 보증금 1,000만 원짜리 월세라도 먼저 가져갈 돈이 많으면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월세보다 관리비와 수리비에서 말이 갈린다
예를 들어 월세 55만 원에 관리비 12만 원이면 매달 나가는 돈은 67만 원입니다. 관리비에 수도·인터넷·청소비가 포함되는지, 전기와 가스는 따로 내는지 계약서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관리비 별도’ 네 글자만 적혀 있으면 입주 뒤에 서로 다른 계산서를 들고 다투기 쉽습니다. 월세 지급일과 계좌, 첫 달 월세를 일할 계산할지까지 적어두면 더 깔끔합니다.
수리도 ‘임차인 부담’이라고 뭉뚱그리면 곤란합니다. 입주 전부터 누수가 있었는지, 보일러가 정상 작동하는지, 벽지와 바닥 상태는 어떤지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깁니다. 계약서에는 확인한 하자와 수리할 사람, 완료 시점을 구체적으로 씁니다. 퇴거할 때도 통상 사용으로 생긴 흔적과 실제 파손을 구분할 자료가 됩니다. 저는 현장에서 작은 곰팡이 자국 하나를 그냥 넘겼다가 입주 전부터 있었는지를 두고 오래 실랑이하는 경우를 여러 번 봤습니다.
특약은 짧아도 날짜와 행동이 보여야 한다
‘임대인은 잔금일 다음 날까지 새로운 담보권을 설정하지 않는다’처럼 누가 언제까지 무엇을 할지 적는 특약이 쓸모 있습니다. 다만 특약 한 줄이 이미 있는 선순위 권리를 지워주지는 않습니다. 대출을 전제로 계약한다면 대출이 나오지 않을 때 계약금 반환과 계약 해제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사전에 합의해 문장으로 남겨야 합니다. 구두로 ‘그때 가서 돌려드릴게요’라고 한 약속은 분쟁이 생기면 입증부터 어렵습니다.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인 계약에서 계약금 200만 원을 먼저 보낸다고 해봅시다. 잔금 날짜, 열쇠를 받는 날짜, 실제 입주 날짜가 서로 다르면 각 날짜를 따로 적습니다. 집을 인도받고 전입신고를 마쳐야 대항력 문제가 이어지고, 확정일자까지 갖춰야 경매·공매에서 우선변제를 주장할 토대가 생깁니다. 확정일자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보증금 전액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권리 순서와 매각대금도 함께 봐야 합니다.
계약서를 쓴 다음 날까지 챙길 일이 남는다
입주한 날 전입신고를 미루지 않고, 계약서의 주소와 신고 주소가 맞는지 확인합니다. 확정일자도 챙깁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주택 인도와 주민등록을 마친 임대차의 대항력은 다음 날부터 생기므로, 계약 후 잔금 사이와 입주 당일의 권리 변동까지 신경 써야 합니다. 이 날짜 차이를 모르고 ‘계약서에 도장 찍었으니 됐다’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주택 임대차 신고 대상인지도 확인해야 합니다. 부동산거래관리시스템 안내에 따르면 해당 지역에서 보증금이 6,000만 원을 넘거나 월세가 30만 원을 넘는 계약은 원칙적으로 체결일부터 30일 안에 신고합니다. 금액이 그대로인 갱신계약 등은 예외가 있으니 계약 형태와 지역을 함께 확인해야 합니다. 계약서를 첨부해 신고가 접수되면 확정일자가 부여되지만, 접수 여부와 부여 내역은 직접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제가 월세 계약서를 볼 때 확인하는 건 월세 액수보다 보증금이 돌아올 길입니다. 등기부의 권리, 다른 세입자의 보증금, 실제로 쓸 돈과 수리 책임이 한 장의 계약서와 맞아떨어져야 마음이 놓입니다. 조금 찜찜한데도 계약금을 먼저 보내면 그때부터 선택지가 줄어듭니다. 현장에서는 하루 늦게 계약한 손해보다, 확인하지 않고 계약한 대가가 훨씬 컸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