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스터리에서 마신 커피가 맛있어서 원두를 사 갔는데, 집에서는 전혀 다른 맛이 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같은 봉지에서 덜어 드린 원두인데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 저는 장비부터 묻지 않습니다. 언제 볶은 원두인지, 물을 얼마나 뜨겁게 썼는지, 추출이 몇 분 걸렸는지를 먼저 듣습니다. 대개 그 세 가지 안에서 실마리가 나옵니다.
커피맛이 달라졌다고 해서 원인이 하나뿐인 건 아닙니다. 신맛이 도드라져도 원두의 산미일 수 있고, 덜 추출된 맛일 수도 있습니다. 아래 수치는 맛을 맞춰 가기 위한 출발점입니다. 입에 맞는 한 잔을 찾는 동안 무엇을 바꿨는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원두를 산 날짜보다 볶은 날짜를 먼저 봅니다
원두 봉지에 적힌 구매일과 로스팅일은 다릅니다. 어제 산 원두라도 한 달 전에 볶았다면 향의 인상은 달라집니다. 반대로 볶은 지 하루 된 원두는 신선하지만, 추출 중 가스가 많이 빠져 물이 고르게 닿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드리퍼에서 물을 부었을 때 크게 부풀어 오르는 모습만 보고 좋은 맛을 보장할 수는 없는 이유입니다.
제 로스터리에서는 핸드드립용 원두를 볶은 뒤 며칠 쉬게 하고 맛을 봅니다. 밝게 볶은 원두는 일주일쯤 지나면서 향이 또렷해지는 경우가 있고, 진하게 볶은 원두는 그보다 이른 시점에 편하게 마실 때도 있습니다. 원두와 포장 상태에 따라 차이가 크니 날짜를 절대 기준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다만 같은 원두가 지난주보다 밋밋하다면 추출법을 바꾸기 전에 로스팅일부터 확인합니다.
개봉한 원두는 공기와 열, 빛을 피해서 밀폐 보관하는 편이 좋습니다. 매일 마실 만큼만 작은 용기에 덜어 쓰면 큰 봉지를 반복해서 여닫는 일도 줄어듭니다. 냉동 보관을 한다면 한 번 쓸 양으로 나눠 밀봉하고, 꺼낸 원두를 다시 넣지 않는 쪽이 다루기 쉽습니다. 향이 이미 많이 빠진 원두를 비싼 드리퍼로 되살리기는 어렵습니다.
물 온도가 커피맛의 방향을 바꿉니다
집에서 가장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은 물 온도입니다. 같은 분쇄도와 같은 양을 썼을 때 물이 뜨거워지면 성분이 더 빠르게 녹아 나옵니다. 온도가 낮으면 산뜻해질 수 있지만, 지나치면 신맛만 날카롭고 단맛이 얇아집니다. 너무 뜨거운 물로 오래 추출하면 쓴맛과 마른 느낌이 거슬릴 수 있습니다.
핸드드립이라면 밝게 볶은 원두는 92~96℃, 진하게 볶은 원두는 88~92℃에서 시작해 봅니다. 어디까지나 시작 온도입니다. 주전자에서 나온 물은 드리퍼와 원두를 만나며 식고, 같은 93℃라도 붓는 속도와 추출 시간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온도계가 없다면 물이 끓은 뒤 잠시 기다렸다가 쓰되, 매번 비슷한 방식으로 기다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맛이 달라졌을 때 이유를 짚을 수 있습니다.
물 자체도 영향을 줍니다. 수돗물의 냄새가 컵에서 느껴진다면 필터를 거친 물로 같은 원두를 내려 비교해 봅니다. 생수로 바꿨다고 무조건 더 맛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네랄 성분이 다른 물은 산미와 단맛의 인상도 바꾸므로, 마음에 드는 물을 찾았다면 한동안 같은 물을 쓰는 편이 온도와 분쇄도를 맞추기 수월합니다.
시거나 쓰다면 분쇄도와 시간을 함께 봅니다
손님이 ‘시다’고 말할 때 제가 먼저 확인하는 것은 산지보다 추출 시간입니다. 너무 굵게 갈면 물이 원두 사이를 빨리 지나가 단맛이 충분히 나오기 전에 추출이 끝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너무 곱게 갈면 물이 오래 머물고, 입안에 남는 쓴맛이나 떫은 느낌이 커지기도 합니다. 물론 산미가 뚜렷한 원두를 굵게 갈았다고 해서 산미의 성격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기준이 필요하다면 원두 15g에 물 240g으로 시작합니다. 원두의 두 배쯤 되는 물 30~45g을 먼저 붓고 30~40초 기다린 다음, 나머지 물을 나눠 부어 총 추출 시간을 2분 30초~3분 30초 정도로 맞춥니다. 이 비율은 맛을 비교하기 편한 기준일 뿐, 모든 원두의 정답은 아닙니다. 같은 드리퍼라도 필터와 붓는 방식에 따라 물 빠지는 속도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2분도 안 돼 추출이 끝나고 신맛이 날카롭다면 한 단계 곱게 갈아 봅니다. 4분 넘게 걸리고 혀에 텁텁함이 남는다면 조금 굵게 갈아 봅니다. 분쇄도를 바꾸는 동안 물 온도와 원두 양은 그대로 둡니다. 여러 조건을 한꺼번에 바꾸면 다음 잔이 맛있어져도 무엇이 효과를 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한 잔씩 기록하면 취향이 선명해집니다
기록이라고 해도 길 필요는 없습니다. 로스팅일, 원두 15g, 물 240g, 물 온도 93℃, 추출 3분, 그리고 ‘첫맛은 시고 식으니 달다’ 정도면 충분합니다. 커피는 식으면서 느껴지는 향과 맛이 달라집니다. 뜨거울 때만 한 모금 마시고 판단하면 좋은 단맛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다음 잔에서는 가장 거슬린 맛 하나만 기준으로 조절합니다. 너무 진하다면 분쇄도보다 물의 양을 조금 늘려 보는 편이 판단하기 쉽습니다. 진하기는 괜찮은데 신맛이 날카롭다면 분쇄도나 온도를 살핍니다. 쓴맛이 오래 남으면 더 굵게 갈거나 온도를 낮춰 봅니다. 이처럼 맛을 말로 남기면 비싼 장비 없이도 내 취향을 찾는 속도가 빨라집니다.
가게와 집의 커피맛이 꼭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집에서 내린 커피가 조금 더 부드럽게 나오는 날도 좋아합니다. 다만 우연히 맛있었던 한 잔을 다시 마시고 싶다면, 원두가 볶인 날과 물 온도, 분쇄도를 기억해 둘 만합니다. 그 작은 기록이 다음 잔을 꽤 안정적으로 바꿔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