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계부를 오래 쓰다 보니 목돈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수익률보다 매달 비는 생활비입니다. 은퇴 뒤 그 빈칸을 메우는 방법으로 즉시연금보험을 묻는 분도 많습니다. 목돈을 한 번에 내고 비교적 이른 시점부터 연금을 받는 상품이라 월수입이 끊긴 집에는 매력적이지요. 다만 같은 돈을 넣어도 받는 방식에 따라 매달 들어오는 금액과 나중에 남는 돈이 달라집니다. 저는 상품 설명을 듣기 전에 가계부에 네 가지 숫자를 먼저 적어봅니다.
1. 생활비에서 실제로 부족한 금액
월 생활비가 250만 원이고 국민연금 등 이미 정해진 수입이 180만 원이라면 부족한 돈은 70만 원입니다. 이때 식비를 억지로 줄여 부족분을 40만 원으로 만드는 계산은 오래가기 어렵습니다. 병원비와 경조사비처럼 매달 똑같이 나가지 않는 돈도 지난 1년 지출을 월평균으로 바꿔 넣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 해 동안 병원비 180만 원, 집수리비 120만 원을 썼다면 월평균 25만 원입니다. 평소 생활비 250만 원에 이 돈이 빠져 있었다면 실제 필요한 금액은 275만 원이고, 수입 180만 원을 뺀 빈칸은 95만 원이 됩니다. 연금 견적서의 월 지급액을 보기 전에 우리 집 빈칸부터 정확히 잡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빈칸 전부를 즉시연금보험 하나로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연금액이 부족분보다 크더라도 당장 쓸 현금이 모자라면 생활은 불편해집니다. 반대로 연금액이 조금 작아도 다른 수입과 현금성 자산으로 메울 수 있다면 선택의 폭이 넓어집니다.
2. 목돈 가운데 묶어도 되는 금액
즉시연금보험에 넣을 돈은 통장 잔액 전체가 아닙니다. 앞의 집에서 월 부족액이 95만 원이라면 그 금액만 1년치로 잡아도 1,140만 원입니다. 여기에 예정된 치료비, 자녀 지원금, 집수리비가 있다면 따로 남겨둬야 합니다. 비상자금의 크기는 집마다 다르지만, 가입 뒤 갑자기 돈이 필요해 해지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습니다.
보험은 보험료 전액을 그대로 굴리는 구조가 아닙니다. 계약 체결과 관리에 드는 비용 등이 반영되고, 초기에 해지하면 환급금이 낸 돈보다 적을 수 있습니다. 특히 연금이 시작된 뒤에는 해지가 제한되는 형태도 있습니다. 예금처럼 필요할 때 원금을 꺼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계획이 어긋납니다.
가계부에는 가입 가능한 목돈과 실제로 묶어도 되는 돈을 다른 줄에 적는 편이 낫습니다. 8,000만 원이 있어도 가까운 몇 년 안에 2,000만 원을 쓸 가능성이 크다면, 비교할 연금 재원은 우선 6,000만 원 이하로 놓는 식입니다. 남겨둔 돈은 놀고 있는 돈이 아니라 생활의 여유를 지키는 돈입니다.
3. 평생 받을지, 기간을 정할지
즉시연금보험은 지급 방식을 먼저 이해해야 월 지급액이 보입니다. 종신형은 살아 있는 동안 연금을 받는 방식입니다. 오래 살 때 생활비가 끊길 걱정을 줄일 수 있지만, 연금 개시 뒤 중도해지가 가능한지와 사망 시 지급 조건을 꼼꼼히 봐야 합니다. 보증기간 유무에 따라서도 가족이 받는 금액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확정형은 10년이나 20년처럼 정한 기간 동안 나눠 받습니다. 기간이 끝나면 지급도 끝나므로 그 뒤의 생활비를 따로 계산해야 합니다. 상속형은 연금 재원에서 생기는 수익을 연금으로 받고, 사망 시 남은 적립액을 지급하는 구조가 일반적입니다. 이 경우 매달 받는 돈이 원금의 일부인지, 수익에 해당하는 돈인지 상품 설명서에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월 부족액이 95만 원인 집에서 어떤 설계안의 예상 연금액이 60만 원이라면, 매달 35만 원을 어디서 마련할지 적어야 합니다. 처음 제시된 금액이 앞으로도 같은지도 중요합니다. 공시이율이 바뀌면 지급액이 달라지는 상품이 있고, 물가가 오르면 같은 6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양은 줄어듭니다. 첫 달 금액 하나로 20년 생활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4. 세후 지급액과 해지환급금
견적을 받을 때는 월 예상액 옆에 세후 지급액, 적용 이율, 최저보증이율, 연도별 해지환급금을 함께 적습니다. 같은 보험료라도 가입 나이와 지급 방식, 보증기간, 비용에 따라 수령액이 달라집니다. 두 회사의 설계안을 비교한다면 보험료와 지급 조건을 같게 맞춰야 숫자가 뜻을 가집니다.
세금도 ‘즉시연금보험은 비과세’라는 한 문장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현행 소득세법 시행령은 일정한 저축성보험의 보험차익에 비과세 요건을 두고 있지만, 계약자별 보험료 합계와 유지기간 등을 따집니다. 2017년 4월 이후 체결한 일반적인 일시납 저축성보험에는 합산 보험료 1억 원 이하 기준이 있고, 최초 납입일부터 10년이 지나기 전에 확정된 기간으로 나눠 받는 경우는 해당 요건에서 제외됩니다. 종신형은 별도 요건이 적용됩니다. 내가 고른 지급 방식과 기존 보험 계약까지 넣어 보험사에 과세 여부를 확인하는 게 안전합니다.
설계안에 적힌 월 60만 원이 마음에 들더라도 가계부의 빈칸이 95만 원이라면 아직 계산이 끝난 건 아닙니다. 남은 35만 원을 감당할 수 있는지, 목돈 일부를 손에 쥐고 있어도 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즉시연금보험은 매달 들어오는 돈을 만드는 수단입니다. 그 돈이 우리 집 지출 리듬에 맞을 때 비로소 마음도 조금 편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