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업 시간에 ‘심심한 사과’라는 문장을 보여 주면 학생들의 반응이 갈립니다. 어떤 학생은 ‘지루한 사과인가요?’ 하고 묻고, 어떤 학생은 과일 사과를 떠올립니다. 글자만 보면 그럴 만합니다. ‘심심하다’와 ‘사과’ 모두 일상에서 다른 뜻으로도 쓰이니까요. 하지만 이 표현에서 심심한 사과는 재미없는 사과도, 맛이 밋밋한 과일도 아닙니다. 마음 깊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심심한’은 왜 ‘깊은’이라는 뜻일까요?
여기서 ‘심심한’의 한자는 甚深한입니다. 甚은 ‘심할 심’으로 정도가 매우 크다는 뜻을, 深은 ‘깊을 심’으로 깊이를 나타냅니다. 두 글자를 함께 놓으면 ‘매우 깊은’이라는 뜻이 됩니다. 국립국어원의 한국어기초사전은 이때의 ‘심심하다’를 마음이나 감정의 표현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아주 간절하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그래서 ‘심심한 사과’는 ‘깊고 간절한 사과’로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같은 사전에는 ‘심심한 감사’, ‘심심한 애도’, ‘심심한 위로’도 용례로 나옵니다. 공통으로 감사하거나 애도하고 위로하는 마음의 깊이를 말하지요. 평소 친구에게 “심심한 감사야”라고 말하면 다소 격식 있게 들릴 수 있지만, 공식적인 인사말이나 글에서는 이런 쓰임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자 두 글자의 뜻을 알면 처음 보는 표현에서도 방향을 짐작하기 쉬워집니다.
그럼 ‘사과’의 한자는 무엇일까요?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는 謝過입니다. 謝에는 사과한다는 뜻이 있고, 過에는 허물이나 잘못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말뜻을 풀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한국어기초사전도 사과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해 달라고 빎’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니 ‘심심한 사과’의 네 글자를 한자로 적으면 甚深한 謝過가 됩니다.
과일 사과와는 소리가 같을 뿐 문장에서 맡은 역할이 다릅니다. “사과를 깎아 먹었다”에서는 과일이고, “실수에 대해 사과했다”에서는 잘못을 인정하는 말이지요. 앞에 붙은 말도 단서가 됩니다. 과일 앞에는 ‘빨간’, ‘아삭한’이 자연스럽고,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 앞에는 ‘진심 어린’, ‘깊은’이 어울립니다. 한자만 외우기보다 문장 전체를 읽으면 뜻이 더 또렷해집니다.
왜 ‘지루한 사과’로 읽히기도 할까요?
일상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심심하다’는 할 일이 없어 지루하다는 뜻입니다. “주말 내내 심심했다”라고 할 때의 그 말이지요. “국물 맛이 심심하다”처럼 간이 약하다는 뜻으로도 씁니다. 한국어기초사전은 이 쓰임들과 한자어 甚深하다를 별도의 표제어로 구분합니다. 같은 소리와 표기를 가진 말이라고 해서 뜻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가령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했다”, “국물이 심심하다”,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를 나란히 읽어 보면 차이가 드러납니다. 첫 문장은 사람의 지루함, 둘째는 음식의 맛, 셋째는 위로하는 마음의 깊이를 말합니다. ‘사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익숙한 뜻 두 개를 먼저 붙잡으면 ‘심심한 사과’가 엉뚱하게 읽히기 쉽습니다. 처음 들었을 때 낯설다고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 낯섦을 계기로 앞뒤 문맥을 한 번 더 보면 됩니다.
사과문에서는 어떻게 쓰는 게 좋을까요?
행사 취소 공지에 “기다려 주신 분들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적었다면, 기다린 분들에게 깊이 사과한다는 뜻입니다. 다만 표현의 뜻이 정확하다고 해서 사과가 충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누구에게 어떤 불편을 주었는지, 어떻게 바로잡을지를 함께 써야 사과의 마음이 전달됩니다. “일정 변경으로 헛걸음하신 분들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새 일정을 개별적으로 안내하겠습니다”처럼 쓰면 읽는 사람도 상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지요.
상대가 ‘심심한’의 뜻을 낯설어할 만한 자리라면 ‘깊이 사과드립니다’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고 써도 좋습니다. 국립국어원의 순화 자료에서도 행정 문서의 ‘심심한’을 ‘깊은’으로 풀어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심심한 사과’가 잘못된 표현인 것은 아닙니다. 뜻을 아는 일과 읽는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쓰는 일은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말을 만날 때마다 한자 한 글자가 문장의 표정을 바꾼다고 느낍니다. 甚深을 알면 ‘심심한’에 담긴 깊이가 보이고, 謝過를 알면 사과가 잘못을 인정하는 말이라는 점이 선명해집니다. 다음에 이 표현을 읽거나 쓸 때는 네 글자의 뜻과 그 말을 받을 사람의 마음을 함께 떠올리게 될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