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한 편을 고르려고 목록을 넘기다 보면 느와르라는 말이 꽤 넓게 쓰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직폭력배가 나오면 붙기도 하고, 어두운 화면의 범죄 스릴러에도 붙죠. 그래서 느와르 영화 순위를 매길 때는 흥행 성적보다 인물이 어떤 선택에 몰리고 그 대가가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먼저 봅니다. 아래 다섯 편은 그런 재미가 뚜렷한 한국 영화입니다. 순위는 제 관람 기준에 따른 것이고, 줄거리의 중요한 반전은 적지 않았습니다.
1위와 2위, 조직 안에서 흔들리는 사람들
1위는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입니다. 조직에 잠입한 경찰 자성이 후계 구도 속에서 어느 편에도 마음 놓고 설 수 없게 되는 이야기죠. 이정재가 연기한 자성의 불안, 황정민이 연기한 정청의 예측하기 어려운 태도가 긴장을 만듭니다. 134분 동안 인물 관계와 세력 구도가 여러 번 움직이지만, 초반에 자성과 정청, 경찰 간부 강 과장의 위치만 잡아두면 따라가기 어렵지 않습니다. 총격보다 대화와 눈치 싸움에 무게가 있어, 범죄 영화에서 배신과 충성의 갈림길을 좋아한다면 첫 편으로 권하고 싶습니다.
다만 <신세계>를 빠른 액션 영화로 기대하면 중반이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조직 내부의 권력 다툼이 중심이고 폭력 장면은 드물지 않게 강합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정보 기준 청소년 관람불가 작품이니, 함께 볼 사람의 취향도 생각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2위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2005)입니다. 보스의 명령을 수행하던 선우가 한 번의 판단으로 조직과 맞서게 됩니다.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한데, 호텔과 밤거리의 공간감, 이병헌의 절제된 표정, 갑자기 터지는 액션이 오래 남습니다. <신세계>가 여러 인물의 관계를 따라가게 한다면 이 영화는 선우 한 사람의 감정과 태도에 더 가까이 붙어 있습니다. 120분으로 다섯 편 중 가장 짧아 장르의 분위기부터 느끼기에도 좋습니다.
3위와 4위, 멋보다 생계와 관계가 앞서는 영화
3위 <비열한 거리>(2006)의 병두는 조직에서 높은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처지에서 위험한 일을 기회로 받아들이죠. 유하 감독은 조직 생활을 근사한 성공담처럼 그리기보다 돈과 체면, 가족 부양이 뒤엉킨 현실로 보여줍니다. 조인성의 병두를 따라가다 보면 왜 그가 무리한 선택을 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그 선택을 응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141분으로 긴 편이고 폭력 수위도 높습니다. 화려한 액션보다 인물이 한 단계씩 궁지로 들어가는 과정에 관심이 있다면 잘 맞습니다.
4위는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2)입니다. 세관 공무원 출신 익현이 조직의 형배와 손잡고 영향력을 키우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는 주먹만큼 인맥과 말솜씨가 중요합니다. 최민식의 익현은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고, 하정우의 형배는 힘으로 질서를 세웁니다. 두 사람이 손잡을 때와 서로를 경계할 때의 온도 차가 볼거리죠. 133분 동안 사람이 많이 등장하므로 초반에는 누가 누구의 편인지보다 익현이 누구에게 기대어 움직이는지를 따라가는 편이 편합니다. 전형적인 복수극을 기대한다면 조금 다르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5위 황해는 왜 각오하고 봐야 할까요?
5위 <황해>(2010)는 앞의 네 편보다 추격 스릴러에 가깝습니다. 빚을 진 구남이 일을 맡아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가 계획을 통제하기보다 사건에 떠밀린다는 점이 이 영화의 어두운 매력입니다. 하정우와 김윤석이 등장하지만 <추격자>와 같은 전개를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황해>는 누가 쫓고 누가 쫓기는지 계속 바뀌며, 불안한 상황을 길게 밀어붙입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 정보에 적힌 상영 시간은 156분입니다. 다섯 편 가운데 가장 길고 폭력 묘사도 거칩니다. 지친 날 가볍게 보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죠. 반대로 인물이 빠져나갈 길을 찾을 때마다 더 깊이 얽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낮은 순위가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한 편만 고른다면
순위를 그대로 재생 순서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인물 사이의 심리전이 끌리면 <신세계>, 선명한 화면과 한 인물의 감정선이 궁금하면 <달콤한 인생>이 좋겠습니다. 조직 생활의 생활감을 보고 싶다면 <비열한 거리>, 권력과 인맥의 거래가 흥미롭다면 <범죄와의 전쟁>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거친 추격과 긴 호흡을 받아들일 날이라면 <황해>가 남습니다.
다섯 편 모두 범죄 세계를 다루지만 보고 난 뒤 남는 감정은 꽤 다릅니다. 제게 오래 남는 느와르는 누가 가장 강했는지보다, 인물이 어느 순간 돌아갈 자리를 잃었는지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