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지인이 전세계약서를 들고 왔습니다. 특약란에는 ‘잔금일에 근저당 말소’라고 딱 한 줄 적혀 있더군요. 경매 물건을 오래 보다 보면 이런 문장이 제일 불안합니다. 잔금을 받은 뒤 말소한다는 건지, 말소 서류만 보여준다는 건지, 실제 등기까지 마친다는 건지 알 수 없으니까요. 지인은 집주인이 좋은 사람 같다고 했지만, 경매 배당에서는 사람의 인상보다 등기 순서가 먼저입니다.
근저당을 지운다는 말에는 날짜와 확인 방법이 필요하다
선순위 근저당이 있는 집이라면 ‘말소 예정’만 믿고 계약금을 넣지 않습니다. 은행 대출 잔액과 말소에 필요한 금액을 확인하고, 잔금 지급과 말소 절차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중개사와 은행에 묻습니다. 돈이 부족해 근저당을 지울 수 없는 구조라면 문구를 잘 써도 위험은 그대로입니다.
제가 계약서에 넣고 싶은 문장은 이런 식입니다. ‘임대인은 잔금 지급과 동시에 계약일 현재 등기부에 기재된 ○○은행 근저당권을 말소하는 데 필요한 서류와 절차를 완료한다. 임차인은 말소에 필요한 금액을 임대인의 대출금 상환 계좌에 직접 지급하고, 나머지 잔금을 지급할 수 있다. 임대인이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임차인은 잔금 지급을 거절하고 계약을 해제할 수 있으며, 임대인은 이미 받은 금원을 즉시 반환한다.’
계좌에 돈을 보냈다고 등기가 곧바로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해당 은행이 직접 상환을 받는 방식과 말소 접수 시점이 가능한지 미리 확인해야 합니다. 잔금일에는 등기사항전부증명서를 다시 떼어 새 압류나 가압류가 생기지 않았는지도 봅니다. 특약은 약속을 분명하게 만들지만, 등기부를 대신 확인해 주지는 않습니다.
잔금 다음 날까지 새 권리를 만들지 못하게 쓰는 이유
전세 세입자는 집을 인도받고 전입신고를 마쳐야 대항력을 갖추며, 그 효력은 다음 날부터 생깁니다. 우선변제를 받으려면 확정일자도 필요합니다. 이 시간 차이를 모르고 ‘잔금 냈으니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계약 직후나 잔금일에 새 담보권이 들어오는 사례가 그래서 무섭습니다.
이때는 ‘임대인은 계약 체결일부터 임차인이 주택을 인도받고 전입신고를 마친 다음 날까지 임차인의 보증금 반환에 불리한 근저당권, 전세권, 가압류 등 새로운 권리를 설정하거나 그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를 위반하면 임차인은 계약을 해제하고 지급한 금원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처럼 기간과 위반 시 조치를 함께 적습니다.
다만 이 문장이 은행이나 다른 채권자의 권리를 자동으로 막아 주는 건 아닙니다. 위반이 생겼을 때 집주인에게 책임을 물을 근거를 남기는 문장입니다. 계약 당일, 잔금 직전, 전입신고를 마친 뒤 등기부를 확인하는 수고가 여전히 필요합니다. 전입신고와 확정일자도 입주 후 미루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보증 가입과 대출은 ‘될 것 같다’로 계약하지 않는다
빌라를 계약하려는 분이 ‘보증 가입 가능하대요’라고 말하면 저는 누가, 어떤 자료로 확인했는지부터 묻습니다. 집주인이나 중개사의 예상과 보증기관의 심사 결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주택 가격, 선순위채권, 다른 세입자의 보증금, 등기상 권리침해 여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다가구주택은 등기부만 봐서는 다른 세입자의 보증금 규모가 드러나지 않는 점도 특히 조심해야 합니다.
보증 가입이 계약의 전제라면 ‘임차인이 계약 후 지체 없이 전세보증 가입을 신청했으나, 임차인의 귀책사유 없이 해당 주택 또는 임대인의 사유로 가입이 거절되면 임차인은 계약을 해제할 수 있고 임대인은 지급받은 금원을 즉시 반환한다. 임대인은 심사에 필요한 서류 제출과 사실 확인에 협조한다’고 적습니다. 어느 보증기관의 어떤 상품을 신청할지도 계약 전에 정해 두는 게 분쟁을 줄입니다.
전세대출이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 문장이 필요합니다. ‘임차인이 기한 내 대출을 신청했음에도 해당 주택이나 임대인의 사유로 대출이 거절되면 계약을 해제하고 지급한 금원을 반환한다’는 식입니다. 임차인의 신용이나 소득 문제까지 집주인 책임으로 돌리는 문구는 합의가 어렵고, 나중에 다툴 여지도 큽니다. 신청 기한과 거절 사유를 확인할 자료까지 서로 이야기해 두면 좋습니다.
특약란을 채우기 전에 물건부터 걸러낸다
경매 현장에서는 보증금이 큰데도 선순위 채권과 다른 세입자 현황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계약을 종종 봅니다. 그런 집에 문구를 열 줄 더 넣는다고 회수 가능 금액이 늘지는 않습니다. 등기사항전부증명서의 갑구·을구, 건축물대장, 실제 주소와 호수, 다가구의 다른 임차인 현황을 먼저 맞춰 봐야 합니다. 임대인의 국세·지방세 체납 여부도 확인 가능한 절차를 통해 살펴볼 부분입니다.
- 권리를 없애기로 했다면 어떤 권리를 언제, 어떤 돈으로 말소할지 적습니다.
- 새 권리를 만들지 않기로 했다면 금지 기간과 위반 시 반환 의무를 적습니다.
- 보증 가입이나 대출이 필수라면 신청 기한, 거절 사유, 해제와 반환 조건을 적습니다.
특약에 ‘무효’라고 한 단어만 써 두면 이미 낸 돈을 언제 어떻게 돌려받을지 다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제할 수 있는 조건과 반환 시점을 구체적으로 씁니다. 집주인이 이런 기본 문장조차 받아들이지 않거나 확인 자료를 계속 미룬다면, 그 반응도 물건을 판단하는 자료입니다.
제가 전세 특약사항 문구를 꼼꼼히 보는 이유는 좋은 계약서를 수집하려는 게 아닙니다. 잔금일에 돈이 어디로 가고, 그다음 날 내 보증금이 어떤 순서에 놓일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 순서가 불안한 집은 계약서 문장을 다듬기 전에 한 번 더 멈춰 보는 편이 제 경험상 덜 비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