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대한항공을 타고 제주에 갔는데, 공항을 나서면서도 어디로 멀리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바다를 보러 차를 빌리는 대신 시내버스를 타고 제주시 원도심으로 향했다. 여행 첫날부터 골목을 걷는 게 조금 심심할까 싶었지만, 돌아오는 길에는 그 시간이 가장 또렷하게 남았다.
공항에서 멀리 가지 않은 첫날
짐은 작은 가방 하나였다. 숙소에 내려놓고 산지천 쪽으로 걸어갔다. 제주에 도착하면 으레 해변이나 오름부터 떠올리는데, 원도심에는 다른 속도가 있다. 하천을 따라 걷는 사람, 장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 문을 열어둔 가게가 한 장면에 들어온다. 특별한 풍경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여행지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났다.
산지천에서는 물길만 따라 빠르게 걷지 않았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잠깐 멈추고 양쪽 길을 봤다. 큰길에서는 차 소리가 가까운데,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면 발소리가 먼저 들렸다. 같은 동네인데도 걷는 위치에 따라 분위기가 달랐다. 사람을 피해 멀리 이동해야만 조용해지는 건 아니었다.
칠성로에서는 목적지를 하나 줄였다
산지천에서 칠성로 상점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처음에는 관덕정까지 곧장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래된 간판과 새 가게가 나란히 있는 거리를 지나니 자꾸 옆길을 보게 됐다. 골목 끝이 궁금해 들어갔다가 막다른 길에서 돌아나온 적도 있다. 그 짧은 왕복이 오히려 좋았다. 지도를 따라가기만 했다면 보지 못했을 집 앞 화분과 낮은 담장을 천천히 볼 수 있었으니까.
칠성로 자체는 조용한 산책로라고 하기 어렵다. 상점가라 오가는 사람이 있고 시간대에 따라 제법 분주하다. 그래서 나는 큰길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골목으로 한두 번 꺾어 걸었다. 한적한 곳을 좋아한다고 해서 동네의 활기까지 피할 필요는 없었다. 북적이는 거리와 조용한 골목이 몇 걸음 사이에 붙어 있는 점이 이 동네의 재미였다.
관덕정 앞에서 걸음을 늦췄다
관덕정에 닿았을 때는 안으로 들어갈 계획부터 세우지 않았다. 주변을 한 바퀴 걸으며 오래된 건물과 일상적인 가게가 만나는 모습을 봤다. 관광객이 사진을 찍고 지나가는 동안, 근처에서는 평소처럼 하루가 흘러가는 듯했다. 유명한 장소를 보고 있다는 생각보다 누군가의 생활권을 잠시 지나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 뒤에는 무근성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원도심을 걷는 코스에 들어가는 길이지만, 이름만 보고 특별한 볼거리를 기대하기보다 길의 폭과 집들이 이어지는 모양을 보는 편이 좋았다. 걸으며 마음에 드는 골목이 있으면 들어가고, 주택 앞에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생활하는 분들이 있는 곳이라 사진도 사람이나 집 안이 담기지 않는 자리에서만 찍었다.
제주에서 보내는 느린 몇 시간
이 코스는 산지천, 칠성로, 관덕정, 무근성길을 이어 걷는 흐름으로 잡으면 된다. 갈림길이 많아 처음부터 소요 시간을 딱 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중간에 쉬고 옆길도 들여다보느라 몇 시간을 썼다. 길이 궁금하면 되돌아가도 되고, 다리가 무거워지면 큰길에서 버스를 타도 된다. 원도심 산책의 좋은 점은 일정을 채우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강한 날에는 골목이 생각보다 춥고 미끄러울 수 있다. 편한 신발을 신고, 문이 열린 가게를 만나면 잠깐 쉬어 가는 정도가 알맞다. 특정 가게의 영업시간을 여행의 중심에 두지 않았더니 문이 닫혀 있어도 아쉽지 않았다. 대신 그날 열려 있던 가게와 거리의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내려 곧바로 제주의 유명한 풍경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산지천 물길에서 시작해 골목을 몇 번 꺾어 걷는 동안, 낯선 도시의 평범한 오후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내게는 그런 시간이 먼 곳에서 본 멋진 풍경만큼 오래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