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매 물건을 볼 때는 등기부 한 줄까지 확인하면서, 일반 매매 계약서의 특약란은 대충 넘기는 분을 꽤 봤습니다. 저도 예전에 잔금일에 매도인의 대출 말소 서류가 늦어져 은행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배웠죠. 아파트 매매 특약 사항은 좋은 말을 적는 칸이 아니라, 돈과 집이 오가는 순서를 정하는 칸이라는 걸요.
근저당은 ‘말소한다’에서 끝나면 불안하다
매매가 6억 원인 아파트에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다고 해봅시다. 매도인이 “잔금 받으면 바로 갚겠다”고 말하는 건 흔합니다. 그런데 계약서에 ‘잔금 시 근저당 말소’라고만 적으면 누가, 어떤 돈으로, 언제까지 말소 서류를 준비할지가 흐릿합니다. 등기부에 찍힌 채권최고액과 실제 대출 잔액도 다를 수 있습니다.
저라면 잔금일 전 금융기관의 상환 예정 금액을 확인하고, 잔금 중 해당 금액을 대출 상환에 직접 쓰는 절차를 협의합니다. 특약에는 ‘매도인은 잔금 지급과 동시에 기존 근저당권 말소에 필요한 서류를 제공하고, 말소 등기 신청에 협조한다’처럼 의무와 시점을 적습니다. 실제 상환 방식과 등기 신청 순서는 은행·법무사와 미리 맞춰야 합니다. 계약일에 등기사항증명서를 봤더라도 잔금 송금 직전에 다시 확인합니다. 그사이 새 압류나 가압류가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살고 있다면 보증금과 인도일을 따로 쓴다
집주인이 직접 거주하는 집과 세입자가 있는 집은 잔금 계산부터 다릅니다. 세입자 보증금 2억 원을 매수인이 승계하기로 했다면, 매매대금 6억 원을 전부 매도인에게 보내는 식으로 처리하면 안 됩니다. 승계할 보증금의 액수, 잔금에서 공제할 액수, 임대차계약 내용과 실제 점유 상태를 서로 맞춰야 합니다. 세입자의 계약서와 입주·전입 상황도 확인할 부분입니다.
반대로 매도인이 세입자를 내보내기로 했다면 ‘잔금일까지 명도’라는 네 글자만 믿기 어렵습니다. 특약에 인도 날짜, 비워야 할 범위, 열쇠를 넘기는 시점,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잔금과 인도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합의해 적는 편이 낫습니다. 매도인과 매수인 사이의 특약만으로 세입자의 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세입자의 퇴거 약속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면 잔금 날짜부터 무리하게 잡지 않습니다.
누수와 옵션은 사진까지 남겨야 덜 싸운다
한번은 현장에서 천장 얼룩을 두고 “예전에 고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런 설명은 계약서에 남기지 않으면 잔금 뒤 누수가 다시 생겼을 때 서로 기억이 달라집니다. 누수가 있었던 위치, 수리 시기, 현재 확인한 상태를 적고 사진을 계약 당사자가 함께 보관하는 게 좋습니다. 수리하기로 했다면 ‘욕실 천장 누수 부위를 잔금일 전까지 매도인 비용으로 수리하고, 완료 내역을 매수인에게 제공한다’처럼 대상과 기한을 씁니다.
에어컨, 붙박이장, 식기세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 상태 매매’라는 문구만으로 어떤 물건을 두고 갈지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제조사나 모델까지 꼭 적어야 하는 건 아니어도, 포함할 품목과 철거할 품목은 목록으로 남기는 게 편합니다. 특히 매수인이 봤던 집의 상태와 잔금일 상태가 달라지면 작은 가전 하나로도 감정이 상합니다.
대출 특약은 실패 사유를 구분해야 한다
매수인이 잔금대출을 받을 예정이라면 ‘대출 불가 시 계약금 반환’이라는 문구는 너무 넓습니다. 매수인의 기존 부채나 신용 문제인지, 해당 아파트의 권리관계 때문에 담보대출이 막힌 건지에 따라 당사자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금융기관에 신청할 기한, 필요한 서류를 누가 제공할지, 어느 사유로 어느 시점까지 대출이 불가능하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협의해야 합니다. 대출이 나온다는 말만 듣고 잔금 계획을 짜는 건 위험합니다.
계약금도 가볍게 볼 돈이 아닙니다. 민법은 다른 약정이 없는 한, 당사자 한쪽이 이행에 착수하기 전까지 계약금을 준 쪽은 이를 포기하고 받은 쪽은 배액을 상환해 계약을 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다만 실제 분쟁에서는 이행 착수 여부나 별도 약정이 중요해집니다. ‘대출이 안 되면 언제든 돌려받는다’고 생각하고 계약금부터 보내는 건 피해야 합니다.
잔금 당일 숫자까지 맞춰야 특약이 쓸모 있다
관리비 체납도 잔금 직전에 관리사무소에서 확인합니다. 특약에는 잔금일을 기준으로 그전까지 발생한 관리비와 공과금을 누가 부담하는지, 미납액은 어떻게 정산하는지 적어둡니다. 공용부분의 체납 관리비는 새 소유자에게 청구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있어, 매도인이 낼 돈이라고만 적고 체납 여부를 확인하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 있습니다.
중개 거래라면 중개대상물 확인·설명서의 권리관계와 계약서 특약을 나란히 놓고 보세요. 서로 다른 내용이 있다면 서명 전에 바로잡아야 합니다. 거래 신고도 계약 체결일부터 30일 이내에 해야 하니 중개사와 처리 여부를 확인해두면 좋습니다.
특약 문장은 길다고 안전해지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하고, 지키지 못하면 잔금과 계약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읽혀야 합니다. 저는 계약 전날 등기부, 점유 상태, 대출 상환액, 관리비를 다시 확인합니다. 잔금날 식은땀을 줄여준 건 멋진 문구보다 그 확인 과정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