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1000편 넘게 보다 보니, 누가 “베니스 영화제 수상작 하나만 골라 달라”고 할 때 오히려 답하기가 어렵다. 같은 황금사자상 수상작이어도 어떤 영화는 숨 막히게 몰아붙이고, 어떤 영화는 한참 조용히 곁에 앉아 있는 느낌을 준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공식 수상 기록에서 확인되는 네 편을 기분과 취향에 따라 골랐다. 아래에는 작품의 출발점만 담았고, 주요 반전과 마지막 장면은 언급하지 않는다.
강한 연기에 끝까지 붙들리고 싶다면 조커
2019년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조커>는 익숙한 만화 속 악당을 떠올리고 틀었다가 예상보다 훨씬 불편한 영화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아서 플렉은 낮에는 광대로 일하고 밤에는 코미디언을 꿈꾼다. 영화는 그를 화려한 악당으로 소개하기보다, 주변과 자꾸 어긋나는 한 사람으로 오래 바라본다.
이 작품을 고를 이유는 빠른 사건 전개보다 인물의 표정과 몸짓에 집중하고 싶을 때 분명해진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걸음이나 웃음이 터지는 순간에도 감정의 방향이 계속 바뀐다. 반면 가벼운 히어로물이나 통쾌한 악당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피로할 수 있다. 폭력적인 장면과 불안한 분위기도 있으니, 보고 난 뒤 기분까지 고려해 고르는 편이 좋다.
조용한 영화가 오래 남는다면 노매드랜드
2020년 황금사자상을 받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노매드랜드>는 <조커>와 거의 반대편에 놓인다. 주인공 펀은 밴을 집 삼아 미국 서부를 떠돈다. 영화는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일하는 시간, 길에서 만난 사람과 나누는 말, 해가 기울 때의 풍경을 차곡차곡 쌓는다.
실제 이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출연한다는 점도 이 영화의 결을 만든다. 배우와 비전문 출연자의 장면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이야기를 따라가다가도 누군가의 삶을 잠시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사건이 선명하게 해결되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심심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실을 다룬 영화가 꼭 큰 울음으로 끝날 필요는 없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오래 남을 가능성이 크다. 혼자 조용히 볼 저녁에 잘 맞는다.
낯선 세계와 과감한 변화를 즐긴다면 가여운 것들
2023년 황금사자상 수상작 <가여운 것들>은 시작부터 화면이 심상치 않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벨라 백스터가 세상을 배우며 자기 뜻을 찾아가는 과정을 기묘한 공간과 과장된 움직임으로 그린다. 엠마 스톤의 연기는 그 낯선 설정을 관객이 따라가게 만드는 중심축이다.
재미는 벨라가 무엇을 ‘정상’으로 받아들일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익숙한 성장 영화의 장면처럼 보이다가도, 인물의 반응 하나로 분위기가 뒤집힌다. 미술과 의상, 독특한 유머를 보는 즐거움도 크다. 다만 성적인 표현과 신체를 다루는 장면이 뚜렷해서 누구와 함께 보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 매끈하고 편안한 이야기를 찾는 날보다는, 영화가 어디까지 낯설어질 수 있는지 궁금한 날 권하고 싶다.
대화와 침묵을 따라갈 마음이라면 룸 넥스트 도어
2024년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에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친구가 있다.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는 장면들이 영화의 중심을 이룬다. 관계를 설명하려고 과거를 요란하게 펼치기보다, 지금 상대의 말을 어떻게 듣는지를 보여준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소재가 영화의 출발점에 놓여 있다. 그래서 그 주제가 현재 마음에 버겁다면 시간을 두고 보는 편이 낫다. 반대로 큰 사건보다 두 배우 사이의 거리와 말없이 흐르는 시간을 읽는 걸 좋아한다면 잘 맞는다. 강한 전개를 기다리기보다, 가까운 사람의 곁에 있다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보게 되는 영화다.
상을 고르기보다 지금의 기분을 고르면
네 편은 모두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지만 감상 경험은 꽤 다르다. 팽팽한 인물극이 필요하면 <조커>, 풍경과 함께 천천히 숨을 고르고 싶으면 <노매드랜드>, 새로운 화면과 유머에 몸을 맡기고 싶으면 <가여운 것들>, 차분한 대화에 머물고 싶으면 <룸 넥스트 도어>가 어울린다. 수상 경력은 영화를 발견하는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날 내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온도를 고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