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고를 때 수상 경력을 먼저 보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같은 베를린 영화제 수상작이라도, 어떤 작품은 조용히 곱씹게 되고 어떤 작품은 보는 내내 불편한 웃음을 준다. 상의 무게보다 지금 내게 맞는 감상 경험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2024년 수상작 네 편을 서로 다른 취향에 맞춰 골랐다. 아래 내용은 이야기의 출발점까지만 다룬다.
상 이름부터 보면 기대가 조금 정확해진다
베를린 영화제의 황금곰상은 작품에 주는 최고상이다. 은곰상에는 심사위원대상처럼 작품 전체에 주는 상도 있고, 연기상처럼 특정 성취에 주는 상도 있다. 베를린영화제 공식 수상 기록을 보면 <다호메이>는 2024년 황금곰상, <여행자의 필요>는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어 디퍼런트 맨>의 세바스찬 스탠은 주연연기상,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에밀리 왓슨은 조연연기상을 받았다. 네 편 모두 ‘수상작’이지만 끌리는 지점은 꽤 다르다.
이 차이를 알고 고르면 기대가 덜 어긋난다. 짜임새 있는 사건을 따라가고 싶은 날과 낯선 형식에 집중할 수 있는 날은 다르니까. 특히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이유만으로 빠른 전개나 뚜렷한 해답을 기대하면, 좋은 영화를 보고도 내 취향과 맞지 않았다는 느낌만 남기 쉽다.
짧지만 오래 남는 다큐멘터리 <다호메이>
마티 디옵의 <다호메이>는 프랑스에 있던 다호메이 왕국의 유물 26점이 오늘날의 베냉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좇는다. 약 68분짜리 다큐멘터리다. 분량만 보면 가볍게 한 편 보기 좋겠지만,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물건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긴 시간이 메워질 수 있을까. 그 물건을 돌려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느끼고, 앞으로 어떻게 다뤄야 할까.
인상적인 건 반환을 하나의 감동적인 장면으로 끝내지 않는 태도다. 유물의 이동을 보여주다가도 그 의미를 둘러싼 목소리에 시간을 준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을 설명받는 느낌보다, 아직 진행 중인 대화에 앉아 있는 느낌에 가깝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고 관람 뒤에도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사람에게 잘 맞는다. 반면 인물 한 명을 따라가는 익숙한 서사를 원한다면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대화 사이의 어색함이 재미라면 <여행자의 필요>
홍상수 감독의 <여행자의 필요>에는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지내는 여성 이리스가 등장한다. 이자벨 위페르가 연기한다. 인물이 누구인지 친절하게 설명하기보다, 그가 사람들을 만나고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따라간다. 대화는 이어지는데 서로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선뜻 알 수 없다. 그 미묘한 간격에서 웃음이 나온다.
솔직히 큰 사건이 터지기를 기다리면 심심할 수 있다. 대신 같은 질문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표정, 말을 고르는 순간의 침묵을 보는 재미가 있다. 홍상수 영화 특유의 반복과 우연을 좋아한다면 90분이 금세 간다. 차분한 저녁에 인물들의 말버릇을 관찰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한다. 명확한 갈등과 속 시원한 해소를 원하는 날에는 다른 작품을 먼저 고르는 편이 낫다.
불편한 웃음을 견딜 수 있다면 <어 디퍼런트 맨>
<어 디퍼런트 맨>은 외모가 달라지면 삶도 달라질 거라 믿는 남자 에드워드를 따라간다. 주연 세바스찬 스탠의 연기가 은곰상 주연연기상으로 이어졌다. 설정만 들으면 변화 뒤의 성공담을 예상하기 쉽다. 그런데 영화의 관심은 바뀐 얼굴보다, 그 얼굴을 가진 자신을 에드워드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있다.
장르는 블랙코미디와 심리 스릴러의 경계에 있다. 웃다가도 내가 무엇을 보고 웃었는지 멈칫하게 만든다. 외모와 타인의 시선, 질투를 다루는 방식이 꽤 날카롭다. 매끈한 위로보다 찜찜한 질문이 남는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쪽이다. 신체적 차이에 관한 묘사와 불안한 분위기에 예민하다면 관람 전 그 점을 감안하는 게 좋다.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재미를 빼앗을 장면이 많아 줄거리 설명은 멈춘다.
조용한 양심의 무게가 끌리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
마지막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다. 1980년대 아일랜드의 한 마을에서 석탄을 배달하며 사는 남자가 주변의 침묵과 마주한다. 2024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사람은 작품 전체가 아니라 조연 배우 에밀리 왓슨이다. 수상 부문을 알고 보면, 짧은 등장만으로도 공간의 공기를 바꾸는 연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 영화는 커다란 행동보다 행동하기 전의 망설임에 오래 머문다. 그래서 속도는 느리지만, 작은 선택 하나가 얼마나 무거워질 수 있는지 선명하다. 킬리언 머피의 절제된 연기를 좋아하거나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일상에서 바라보는 드라마를 찾는 사람에게 맞는다. 아동과 종교 기관을 둘러싼 어두운 현실이 바탕에 있으니 마음이 무거운 날에는 피하는 편이 좋겠다.
내가 한 편만 고른다면 그날의 기분을 먼저 따질 것 같다. 새로운 형식에 마음을 열 수 있는 날엔 <다호메이>, 사람 사이의 이상한 간격이 보고 싶은 날엔 <여행자의 필요>다. 수상 경력은 좋은 출발점이지만, 끝내 영화를 오래 남게 하는 건 내 취향과 만난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