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트릭 스튜어트의 별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우주선의 전투 장면이 아니었다. 함교에서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던 피카드의 얼굴이었다. 1,000편 넘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도, 힘을 과시하지 않고 권위를 보여주는 배우는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스튜어트는 2026년 10월 28일,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변인이 발표한 소식을 AP통신 등 여러 매체가 전했다. 장 뤼크 피카드와 찰스 자비에라는 두 인물이 곧바로 떠오르지만,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고 해서 비슷한 역할은 아니다. 어떤 작품부터 볼지 고민된다면 줄거리보다 지금 끌리는 감정으로 고르는 편이 좋다. 아래 작품 이야기는 중요한 반전을 밝히지 않는다.
믿고 따르고 싶은 어른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권하고 싶은 작품은 드라마 《스타트렉 넥스트 제너레이션》이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방영된 7시즌, 178편짜리 시리즈라 시작부터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피카드 선장에게 익숙해지는 데 전편을 다 볼 필요는 없다. 낯선 문명과 맞닥뜨린 승무원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의견을 나누는 장면만으로도 이 인물의 매력이 드러난다.
피카드는 답을 가장 빨리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전문성을 듣고, 자기 판단의 책임은 피하지 않는다. 스튜어트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는 그 태도를 설득력 있게 만든다. 우주 전투보다 대화와 윤리적 선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맞는다. 빠른 사건 전개를 기대한다면 초반 몇 편의 호흡은 느리게 느껴질 수 있다.
이미 피카드를 좋아한다면 《스타트렉 피카드》로 이어가도 좋다. 총 3시즌에 걸쳐 같은 인물이 나이 든 뒤의 삶을 보여준다. 다만 첫 만남으로는 《넥스트 제너레이션》이 낫다. 오래전 함교에서 쌓인 관계를 알고 볼수록 훗날의 침묵과 재회가 더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선한 인물의 확신이 흔들릴 때를 보고 싶다면
영화 《엑스맨》의 찰스 자비에는 피카드와 닮은 듯 다르다. 둘 다 사람들을 이끌고 갈등을 말로 풀려 하지만, 자비에에게는 제자들을 지키려는 마음과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가려는 고집이 함께 있다. 스튜어트는 그 두 면을 한 사람의 표정에 담는다. 온화한 말투 뒤에서 판단이 굳어지는 순간을 보면, 왜 이 역할에 그의 존재감이 필요했는지 알게 된다.
2000년 첫 영화는 자비에를 만나는 출발점으로 좋다. 초능력 액션이 입구지만, 오래 남는 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는지를 두고 벌이는 갈등이다. 히어로 영화에서 능력의 크기보다 인물 사이의 신념 차이를 즐긴다면 잘 맞을 것이다. 반대로 스튜어트의 연기만 집중해서 보고 싶다면 출연 인물이 많은 시리즈의 특성상 분량이 아쉬울 수 있다.
한 배우가 품은 시간까지 느끼고 싶다면
《로건》은 스튜어트의 자비에를 다시 볼 때 가장 조심스럽게 권하는 영화다. 피로와 돌봄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고, 폭력 묘사도 강하다. 가벼운 추억 여행을 생각했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여기서부터는 설정 수준의 언급이 있다. 주요 사건이나 마지막 장면에 관한 스포일러는 없다.
이 작품의 자비에는 더 이상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스승처럼 보이지 않는다. 로건이 그를 돌보는 관계 속에서 스튜어트는 인물이 쌓아 온 세월을 몸짓으로 보여준다. 예전 영화에서 자비에의 침착함을 기억한다면 작은 흔들림도 크게 느껴진다. 히어로 영화보다 인물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 누군가를 돌보는 관계의 복잡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에게 권한다. 《엑스맨》을 먼저 보고 오면 같은 얼굴이 달라 보이는 이유도 선명해진다.
익숙한 목소리의 다른 얼굴이 궁금하다면
《그린 룸》에서는 기대하던 스튜어트를 만날 수 없다. 그 점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그는 한 록 밴드가 빠져나오려 애쓰는 공간을 지배하는 인물을 연기한다. 피카드와 자비에에게서 느꼈던 차분한 말투가 여기서는 안심의 신호가 아니라 위협으로 들린다. 같은 배우의 목소리를 전혀 다르게 듣게 되는 경험이다.
상영 시간이 약 95분으로 앞선 시리즈들보다 접근하기 쉽지만, 긴장감과 폭력 수위는 높다. 스튜어트의 폭넓은 연기를 짧고 강하게 확인하고 싶은 스릴러 팬에게 맞는다. 추모하는 마음으로 편안한 작품을 찾는 밤이라면 다른 작품을 먼저 고르는 편이 좋겠다.
나는 스튜어트를 떠올릴 때 피카드의 품위와 자비에의 다정함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다. 지친 사람, 잘못 판단할 수도 있는 사람, 서늘하게 타인을 압박하는 사람까지 설득한 배우였다.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지금 마음에 맞는 한 편을 고른다면, 익숙했던 목소리에서도 전에 듣지 못한 감정이 들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