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스터리에서 아포가토를 내면 “집에서는 왜 커피 맛이 묻힐까요?”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원두를 바꿔야 하나 싶지만, 먼저 보는 건 아이스크림 양과 커피의 농도입니다. 아이스크림이 녹은 뒤에도 커피 향이 남아 있어야 마지막 숟가락까지 맛있거든요.
아이스크림과 커피의 양부터 맞추기
처음 만들 때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80~100g에 에스프레소 30~35g을 권합니다. 아이스크림은 작은 공 모양으로 두 덩이보다 큼직한 한 덩이가 좋습니다. 표면이 천천히 녹아 처음에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뒤에는 커피와 섞인 크림을 맛볼 수 있습니다.
커피를 50g 넘게 붓고 아이스크림이 금세 녹아버렸다면, 커피가 진하지 않아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따뜻한 액체의 양이 많아진 탓입니다. 먼저 30g 안팎으로 줄여 보고, 부족할 때 조금 더 붓는 편이 맛을 잡기 쉽습니다.
아이스크림도 차이가 큽니다. 바닐라 향이 강하고 단맛이 높은 제품은 커피 향을 가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맛이 단순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비율을 잡아 보세요. 같은 커피라도 아이스크림을 바꾸면 쓴맛과 산미가 느껴지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에스프레소는 짧고 또렷하게 추출하기
제가 집에서 기준으로 삼는 양은 원두 18g을 담아 에스프레소 32~36g을 받는 것입니다. 추출 시간은 펌프가 작동한 뒤 대략 25~30초를 출발점으로 잡습니다. 원두와 기계마다 달라지는 수치라 시간을 맞추느라 맛을 희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스크림 위에서는 커피가 곧 희석되니, 마셨을 때 향과 단맛이 또렷한 샷이 잘 어울립니다.
커피가 유난히 시고 묽다면 분쇄도를 조금 더 곱게 조절합니다. 반대로 혀에 오래 남는 떫은맛이 강하면 조금 굵게 갑니다. 한 번에 여러 조건을 바꾸면 무엇이 맛을 바꿨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원두 18g과 추출량 35g을 유지한 채 분쇄도만 움직여 보는 이유입니다.
물 온도는 92~94℃ 정도에서 시작합니다. 밝게 볶은 원두는 우유 성분과 만나면 과일 같은 산미가 더 도드라질 때가 있습니다. 그 맛을 좋아한다면 그대로 즐기면 됩니다. 초콜릿이나 견과류 쪽의 편안한 맛을 원한다면 중배전부터 중강배전 원두가 다루기 쉽습니다. 볶은 지 오래돼 향이 약해진 원두는 아이스크림의 단맛을 뚫고 나오기 어렵습니다. 원두를 산 날짜와 함께 로스팅 날짜도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기계가 없어도 농도는 만들 수 있습니다
에스프레소 머신이 없어도 아포가토는 만들 수 있습니다.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를 30~40g 정도 쓰면 됩니다. 평소 한 잔으로 마실 때보다 진하게 느껴져도 아이스크림과 섞이면 균형이 달라집니다. 모카포트를 쓸 때는 커피가 튀거나 거친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불에서 내려 과한 쓴맛을 줄입니다.
드리퍼만 있다면 원두 20g에 물 90g을 부어 작은 양의 진한 커피를 내려 봅니다. 일반적인 핸드드립 한 잔보다 훨씬 농축된 레시피입니다. 추출된 커피 가운데 35~40g을 아이스크림에 붓고 맛을 봅니다. 에스프레소처럼 두터운 질감은 덜하지만, 원두의 향을 살린 아포가토가 됩니다.
인스턴트커피를 쓴다면 진하게 녹이되 가루를 무턱대고 늘리지는 않는 게 좋습니다. 뜨거운 물 30g에 제품 권장량의 커피를 녹여 먼저 맛본 뒤 농도를 조절하세요. 쓴맛만 강한 커피를 붓는 것보다, 한 모금 마셨을 때 향이 나는 커피를 붓는 편이 낫습니다.
담는 순서가 마지막 맛을 바꿉니다
잔은 미리 차갑게 해 둡니다. 냉장고에 10~15분 넣어 두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차가운 잔에 아이스크림을 담고, 커피를 추출한 다음 바로 천천히 붓습니다. 갓 나온 샷을 오래 식혀 두면 향이 흐려지고, 너무 많은 커피를 한꺼번에 부으면 아이스크림이 빠르게 녹습니다. 아이스크림 한쪽 면을 따라 부으면 녹는 속도를 눈으로 보며 양을 조절하기도 좋습니다.
처음 몇 숟가락은 섞지 않고 먹어 보세요. 따뜻한 커피와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따로 닿는 순간이 아포가토의 재미입니다. 중간부터 녹은 부분을 가볍게 섞으면 달고 부드러운 커피로 맛이 옮겨 갑니다. 견과류나 초콜릿을 얹고 싶다면 소량만 쓰는 편이 좋습니다. 토핑보다 먼저 커피와 아이스크림의 균형이 잡혀야 원두 향도 남습니다.
아포가토가 너무 달게 느껴지는 날에는 더 쓴 원두를 찾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10~20g 줄여 봅니다. 반대로 커피가 거칠게 튄다면 원두를 바꾸기 전에 추출을 조절하거나 아이스크림을 조금 늘려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아포가토는 특별한 재료를 많이 얹은 잔보다, 녹아가는 동안 커피 맛이 조금씩 달라지는 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