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뚜리국’이라는 단어를 보고 음식 이름인가 싶어 잠깐 멈칫했어요. 검색해 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였습니다. 2026년 10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강서구 여성 사망 사건에 등장한 가상의 나라 이름이더군요. 이름만 떼어 보면 가볍게 들릴 수 있지만, 이 단어가 나온 맥락은 무겁습니다.
뚜리국은 실제 나라가 아니에요
뚜리국은 피해 여성과 동거하던 남성이 말한 ‘국프’에 등장합니다. 국프는 ‘국가 프로젝트’를 줄인 말이에요. SBS 보도에 따르면 관련 문서에는 뚜리국이라는 가상의 나라와 입법부, 사법부, 금융기관, 전산화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국가나 공공기관의 사업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창작물로만 생각하면 사건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방송에서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문서 작성은 주로 피해자의 몫이었고, 남성은 이를 전산화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남성은 제작진에게 덜 싸우기 위해 만든 규칙이라고 설명했지만, 그 규칙을 집행하는 권한은 자신에게만 두었습니다. 같은 프로젝트를 한다는 말과 실제 관계에서 누가 지시하고 누가 따랐는지는 따로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국프라는 말이 사건에서 중요한 이유
사건을 다룬 SBS ‘그것이 알고 싶다’ 1509회의 제목은 ‘국프와 514번의 처벌’입니다. 방송은 두 사람 사이에서 반복해서 언급된 국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추적했어요. 피해자의 휴대전화에 남은 문서와 녹음 파일, 두 사람의 대화 등을 통해 가상의 나라를 만드는 일이 일상적인 지시와 규칙으로 이어졌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방송에 소개된 의사소통 규칙에는 상대가 거짓말을 했다고 판단하면 해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처벌할 수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 있었습니다. 누가 거짓을 판단하고 처벌할지까지 한쪽이 정한다면, 평범한 약속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말다툼을 줄이기 위한 규칙이라는 설명과 달리, 방송이 보여 준 관계에서는 피해자가 자신의 말을 설명할 여지가 매우 좁았던 셈이에요.
여기서 조심할 점도 있습니다. 문서의 모든 내용이 실제 폭력으로 이어진 과정이나 피고인의 법적 책임은 방송 제목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방송이 공개한 자료, 당사자의 주장, 전문가의 해석은 서로 구분해서 읽는 게 정확합니다. ‘뚜리국’이라는 낯선 이름 자체보다 그 이름 아래에서 어떤 행동이 벌어졌는지를 보는 편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됩니다.
514라는 숫자는 무엇을 뜻할까요
SBS는 사건 당일 집 안의 영상에 약 3시간 20분 동안 피해자를 514차례 폭행한 장면이 담겼다고 보도했습니다. 따라서 514는 뚜리국의 주민 번호나 피해자에게 붙인 고유 번호가 아니라, 보도에서 언급한 폭행 횟수입니다. 온라인 글에서 숫자의 뜻을 달리 설명하는 경우가 있어도, 원래 보도에서 무엇을 셌는지 먼저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방송에 따르면 남성은 폭행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살해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부검 결과와 영상, 이전부터 나타난 폭행 흔적을 근거로 방송은 장기간 이어진 폭력과 통제 문제를 제기했어요. 수치가 워낙 충격적이라 숫자만 기억하기 쉽지만, 그 앞에 피해자가 일상에서 겪었을 압박이 있었다는 점도 놓치기 어렵습니다.
비슷한 상황을 알아챘을 때
가까운 사람이 연락할 때마다 긴장하거나, 상대에게 답하기 위해 자신의 말과 행동을 계속 검열한다면 그냥 둘 사이의 성격 차이로 넘기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만든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위협하거나 벌을 주는 행동은 더 분명한 위험 신호예요. 이 사건에서도 동료들이 피해자의 잦은 통화와 멍, 절뚝거림 같은 변화를 목격했다고 SBS는 전했습니다.
주변 사람이라면 왜 바로 떠나지 않았느냐고 묻기보다, 안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당장 위험하다면 경찰 긴급신고 112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폭력 피해 상담과 보호가 필요할 때는 24시간 운영되는 여성긴급전화 1366도 연결할 수 있어요. 성평등가족부는 이 전화가 긴급 상담과 보호를 위한 창구라고 안내합니다.
뚜리국의 뜻을 찾다가 결국 오래 남는 것은 가상의 나라 이름이 아닙니다. 친밀한 관계에서도 한 사람이 규칙과 처벌을 독점하면 다른 사람의 선택지가 얼마나 빠르게 줄어드는지, 그 변화에 주변이 얼마나 일찍 귀 기울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